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 말고도 정류장에는 20대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50대쯤 돼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 같은데 갑자기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갔다. 영문을 아십니까. 여자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늘 불안하고 걱정이 많죠. 남자가 말을 이었다. 인간이 불안 속에 사는 것은 영문 때문입니다. 모두 말하죠. 영문을 모르겠네, 영문을 알 수가 없어. 세상에 영문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그 영문을 함께 공부해보지 않겠습니까.
척 봐도 사이비 종교 전도사가 분명했다. 영문이라니. 잉글리시 텍스트를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저런 사람이 있나 싶었다. 대낮에 대로에서 별일이야 있겠냐만 그래도 여자가 살짝 걱정돼서 여차하면 도와줄 생각으로 나는 그들을 주시했다.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은 급한데 되는 일이 없지요. 척 때문입니다. 아가씨 주위에 척이 많다는 거예요.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척? 적도 아니고 척이라니. 그때 뜻밖에도 여자가 입을 열었다. 척이 뭔데요. 남자는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일러준다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척은 아가씨가 잘되는 걸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아가씨 엄마일 수도 있고 친구거나 애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척 잘 산다, 무척 행복하다, 이런 말이 나온 겁니다. 무척, 즉 척이 없으니까 잘 살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거죠.
듣자 하니 영문도 그렇고 척도 그렇고 남자의 주장은 황당한 한편 신선한 면이 있었다. 가만, 무척이 척이 없다는 뜻이면, 무가 없을 무라는 건데. 그러면 척도 한자인가. 무척이 한자어였나.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여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무척 못산다, 무척 불행하다, 이런 말은 어떻게 나온 건가요.
잠시 말이 없던 남자는 곧 횡설수설했다. 아, 그건… 그러니까 잘못된 거고, 잘못된 건데…. 여자는 남자의 주장에서 허점을 발견한 자신이 ‘무척’ 대견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남자는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냉큼 올라탔다. 여자는 그다음 버스에 탔다. 두 사람이 같은 버스를 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휴대폰으로 인터넷 국어사전에 접속했다. ‘무척’은 보통 정도를 넘어서 매우, ‘영문’은 일의 진행되는 까닭이나 형편, 둘 다 우리말이었다. 잠깐 동안 좋은 공부 했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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