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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당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新지식인”

입력 : 2021-08-18 01:30:00 수정 : 2021-08-17 19: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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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서 탄생 200주년 토크 콘서트

15세에 마카오까지 5000㎞ 유학길
고종보다 먼저 커피 맛본 첫 조선인

라틴어·영어·불어 등 5개국어 능통
김정호보다 16년 앞서 지도 제작도

천주교 박해 맞서 목숨건 선교활동
엄격한 신분사회서 평등·박애 외쳐
김대건 신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외래 종교가 이국땅에 정착하는 과정은 험난하다.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문화적 뿌리를 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리학을 국가 원리로 삼았던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믿는 것이 ‘강상죄’(삼강오륜을 어긴 죄)에 해당해 역모에 버금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런 시대를 겪으며 순교를 당한 조선의 천주교인은 1만여명에 달한다. 조선인 최초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1821∼1846) 신부도 그런 순교자 중 한 명이다. 신분사회에서 그가 외친 ‘평등’과 ‘박애’는 당대 사회에서 하나의 종교를 전파하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김대건 신부가 전하는 울림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한국천주교는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김 신부를 기리며 희년을 선포했고, 유네스코는 ‘2021 세계기념인물’로 지정했다. 지난 14일에는 김 신부의 생가인 충남 당진 솔뫼성지에서 한 시대의 종교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김 신부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김 신부의 후손인 김용태 신부와 그의 업적을 책으로 남긴 강종민 작가, 전현정 작가, 김영 작가가 함께했다.

◆15세 나이로 5000㎞ 유학길

△김용태 신부=“김대건 신부의 신앙생활은 15세에 떠난 유학길에서 시작됐다. 그가 유학을 떠난 것을 기점으로 순교하기까지 10여년의 삶 중 9년이 유학 생활이었다. 그의 신앙생활을 얘기하려면 유학 생활을 먼저 짚어볼 수밖에 없다.”

△강종민 작가=“아시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한 파리외방전교회는 포교지에 성직자를 양성하고 교회가 운영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선교사가 생활하기 어려웠다. 특히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 외국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서둘러 조선인 사제를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당시 조선에 신앙심이 있는 신학생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데 공들였다. 김 신부가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유학을 떠난 배경이다.”

지난 14일 충남 당진 솔뫼성지에서 김대건 신부의 업적을 돌아보는 토크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강종민 작가, 김용태 신부, 배우 손여은, 전현정 작가, 김영 작가. 당진시 제공

△전현정 작가=“조선 시대 유학생은 고종(1863∼1907) 재임 시기부터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로 떠난 것은 그보다 수십년 전인 1836년이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김대건 신부는 마카오까지 장장 5000㎞의 여정을 6개월간 걸어서 이동했다. 함께 떠난 두명의 동료도 또래였는데, 이들이 이 여정을 완주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다.”

△김영 작가=“당시 조선인이 마카오에서 유학을 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김대건 신부는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고 빵과 커피를 먹었다. 조선에서 최초로 커피를 마신 인물은 고종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실제로는 김 신부가 일찍이 경험했던 것으로 스승인 리보아 신부의 서신에 기록돼 있다.”

◆5개 국어에 능통, 최초의 ‘조선전도’

△전 작가=“김대건 신부는 무려 5개 국어를 구사했다.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에서의 생활에 필요했던 라틴어와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언어 능력은 조선으로 입국하는 험난한 과정에서 도움이 됐다. 당시 조선으로 향하던 프랑스 군함의 함장 세실은 프랑스어가 능통한 김 신부와 동행했고, 그 과정에서 김 신부가 난징조약에 참석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작가=“당시 조선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외국인 선교사가 들어오기 힘들었지만, 들어온다고 해도 언어의 차이로 소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외국어 능력을 갖춘) 조선인 사제가 절실했던 배경이다.”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 당진시 제공

△강 작가=“김대건 신부가 조선에 돌아온 뒤로는 (그의 외국어 능력 덕분에) 조선인들이 외국어로 된 성사를 보지 않아도 되고, 우리말로 소통할 수 있게 됐다. 통역사 역할을 했던 김 신부는 지도도 제작했다. 당시 선교사들을 위해 제작한 ‘조선전도’는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무려 16년 앞선 것이다. 특히 이 지도는 조선식 지명을 로마자로 표기해 서구사회에 조선의 지명을 소개한 첫번째 지도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는 이 지도에서 독도를 로마자로 ‘Ousan’이라고 표기해 당시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순교자 넘어, 치열했던 실존인물”

△김 신부=“김대건 신부가 1846년에 쓴 편지에는 지도와 관련한 언급이 있다. 그는 ‘조선의 대신들이 저에게 영국에서 만든 세계지도 한장을 주면서 번역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저를 큰 학자로 여기는데 참으로 딱한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김 신부가 ‘딱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조선 대신들이 자신을 지식인으로만 여길 뿐, 진리를 전달하는 것을 보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전 작가=“당시 천주교에 대한 박해 속에 신앙생활을 하려면 첩첩산중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에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여정이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를 두고 ‘최초의 사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인물로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넘어 당대에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실존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김 작가=“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 걸었던 사람이다. 박해받은 순교자를 넘어 최장거리 도보여행을 했던 지리학자이자 5개 국어가 능통했던 지식인이었다. 엄격했던 신분사회에서 평등을 외친 신지식인이지만, 당대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순교를 택해야 했던 인물이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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