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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 되돌릴 수 있는 예술, 영원한 감동을 주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1-08-14 19:28:21 수정 : 2021-08-14 19: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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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예술가 백현진의 ‘사라지는 그림’
‘작품’이라는 명분으로
폐기물을 양산하는 것은
지구에, 인류에 괜찮을까
역병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지속가능한 예술에 대해
깊은 고찰이 필요할 즈음
백현진의 ‘생분해 가능한 것’展
아무것도 아니며 동시에
절대적인 것의 역설 보여
친환경적 작업 과정을 통해
‘사라지는 예술’ 첫발
‘생분해 가능한 것’ 연작 중 하나로, 자연 분해 가능한 재료만을 사용해 제작한 회화다. 백현진만의 자유로운 붓 움직임과 감각적인 색의 사용이 느껴진다. ‘생분해 가능한 것 21-03’

PKM 갤러리 제공

#지속 가능한 미술을 위하여

“이번 여름은 정말 고약한 여름이네”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계절인 여름에 ‘고약하다’라는 단어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반도를 뒤덮은 열돔은 35도를 넘나드는 더위를 가져와 생활을 괴롭게 만들었다. 뜨거운 날을 좋아하지만, 야외에서 일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특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올여름 초, 미국 서부가 열의 장막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으며 남의 이야기처럼 생각했던 일이었다. 정말 이제는 환경 오염에 의한 기후 변화가 나와 직접적 관련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환경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관심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와중 얼마 전 나에게 충격을 던진 것은 나의 일 역시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에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복잡한 미술 일을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작가들은 작품을 제작하고 기획자들은 그것을 전시하는 것일 터다. 비평가와 이론가들은 거기서 선보여진 장면들을 읽어내고, 연구하며, 글을 써서 남긴다. 이렇게 볼 때 미술 일에서 전시는 꼭 있어야 하는 핵심적 사건이자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한데, 이 전시의 과정에서 그동안 인지하지 못한 온실가스와 폐기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부산현대미술관은 ‘지속 가능한 미술관: 미술과 환경’이라는 전시를 열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실제 상황! 총 6점의 작품이 뉴욕에서 출발하여 부산현대미술관에 도착한다. 작품의 총 무게는 1273㎏이다. 뉴욕 공항(JFK)에서 인천공항(ICN)까지 거리는 1만1092㎞이다. 항공 운송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5.98t(Tco2EQ)이다. 인천공항에서 부산현대미술관까지 거리는 432.54㎞이며 트럭 운송 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12t이다. 즉, 뉴욕에서 부산현대미술관까지 작품 항공 운송에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는 16.1t이며 이는 편도 기준으로, 작품을 돌려보낸다면 총 32.2t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이는 한국인의 1인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14.1t, 2018년 기준)의 2배가 넘는다.”

나의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계산하니 작품 배송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항공 운송을 할 때마다 작품 보호를 위해 커다란 크레이트를 스티로폼과 나무로 겹겹이 제작했던 것이 떠올랐다. 전시를 마친 뒤에는 그 크레이트들을 망치 등으로 부수어 쓰레기로 폐기처리하곤 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알고 나니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미술관의 시도가 의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속 가능한 미술과 관련하여 최근 본 백현진의 작품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말보다는’ 전시 장면.

PKM 갤러리 제공

#예술가 백현진의 사라지는 그림

백현진은 예술가다. 어여부 프로젝트와 방백으로 음악 활동을 펼치고 최근에는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드라마 ‘모범택시’ 등에서 소름 돋게 사실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음악과 연기 등을 넘나드는 그의 예술 세계는 미술에도 역시 자리 잡고 있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에서 공부한 작가는 자기만의 작업 세계로 미술계에서 오랫동안 작품을 선보여왔다. 한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플라토, 아트선재센터, 성곡미술관, 상하이 민생 현대미술관, 쿤스트할레 빈 등 주요 미술 기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백현진의 회화는 만날 때마다 이상한 경험을 하게 한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림이 좋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지금까지 경험한 회화와 달리 별나고 색다른 시각적 자극을 받는다. 그는 특정한 내러티브 혹은 도식적인 구성을 배제하고 익숙하지 않은 도상과 우발적인 붓질로 화면을 채운다. 사람의 얼굴같이 보이다가 건물의 도면으로 다가오는 등 명확히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대상을 그린다. 직관을 따르는 이 그리기 방법은 보는 이에게 낯선 수수께끼와 같이 그림으로 눈앞에 등장한다. 예술적 수행과 의미의 공허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어 그 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을 연출해 전한다.

백현진에게 회화는 그가 견지하는 미학적 태도와 관심을 실천해볼 수 있는 방법의 하나다. 그는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 듯 미술에서도 영상, 회화, 퍼포먼스 등 다양한 시도를 펼친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회화 작업의 미학적 목표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하는 일(Doing for Nothing)’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아무것도 아닌 것’은 존재나 의미의 부정이 아니라 그 너머의 것이다. 들판을 쏘다니는 개처럼, 공중에 머뭇거리는 새처럼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기에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절대적일 수 있는 상태의 역설이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의 개인전 제목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이라고 붙이기도 했다.

작가는 이번에는 ‘말보다는’이라는 이름을 붙인 개인전을 PKM 갤러리에서 열었다. 이 전시에서 ‘생분해 가능한 것’이라는 시리즈를 선보였다. 제목에서 유추 가능하듯 자연에서 분해되어 사라질 수 있는 그림을 그려냈다. 캔버스, 캔버스 프레임을 비롯해 프레임 접착에 사용하는 본드마저 천연 재료를 공수해 사용했다.

작가는 재료 공수를 위해 생전 처음 조수를 고용했고 작품 제작 비용이 전보다 높아졌다. 그런데도 그는 이 작업의 결과가 자기 “뱃속”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고백한다. 역병의 시절을 통과하면서 환경 파괴와 관련 미술 작품 제작에 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는 물체를 생산하는 것은 괜찮을까 하고 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들과 새와 개와 재능’에서도 그에게는 자연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인간의 문명이 따라왔다. 문자 그대로 들과 새와 개가 먼저고 인간의 재능은 그들의 세계에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생분해 가능한 것 21-03’은 이러한 ‘생분해 가능한 것’ 시리즈 중 한 점이다. 전시장에서 자주 만나는 유화를 기준으로 삼자면 이 작품이 상대적으로 더 투명하다. 투명한 색들이 붓질로 남은 장면을 감상하는 법을 작가는 “이게 말로 하기엔 진짜 너무…”라고 제시한다. ‘사람이 많이 다녀 막다른 골목이라 미처 생각지 못한 곳’이라는 가상의 대본에서 발췌한 대사다. 이 대사는 누군가의 언어에 의존하기보다 각자 보고 들리는 대로 감상하고 느끼는 방식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작품을 선보인 전시에서 작품을 설명하는 모든 텍스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관람객이 각자 보고 들리는 대로 관람하시기를” 희망했다. 현대부터 동시대에 이르는 미술에 언어가 더하는 무게와 굴레는 일찍이 데리다(Jacques Derrida) 등에 의해 지적받았다. 작품은 보는 이에 따라 제가 지닌 의미와 형태에 변주를 경험한다.

회화는 우리 곁에 오래 머물며 영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막연한 믿음의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하나는 회화의 물리적 지속성일 것이다. 일례로 프랑스 라스코 동굴 안의 구석기 벽화는 여전히 선명하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사람들이 바티칸으로 향하게 만든다. 여기서 비롯한 회화의 영속성에 관한 믿음은 인간의 욕망과 맞물려 회화를 소유의 존재로 만들었을 수 있다. 백현진은 자연 분해 가능한 그림을 등장시켜 환경 파괴와 이 욕망의 대척점에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작품을 구매해 보던 이가 자연으로 돌려보내 작품이 사라지면 정말 멋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이 말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것 같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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