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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 넓은 깊은 서정… 외로운 인간을 보듬다

입력 : 2021-08-10 19:43:34 수정 : 2021-08-10 19: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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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시선집 개정증보판 발간

1973년 ‘첨성대’로 등단
반세기 동안 13권 시집
직접 뽑은 275편 실어

‘부치지 않는 편지’ 등
희망과 위로 놓지 않아
많은 시, 노래로 재탄생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서정시인 정호승이 자신의 대표작 275편을 자선해 엮은 시선집을 새로 펴냈다. 그는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읽는 사람의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할머님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할아버지 첫날밤 켠 촛불을 켜고/ 첨성대 속으로만 산길 가듯 걸어가서/ 나는 홀로 별을 보는 일관(日官)이 된다”(‘첨성대’ 부문)

데뷔작에서 힘겨웠던 가족과 시대를 대표해 첨성대를 지키는 일관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아호를 ‘첨성(瞻星)’이라고 부르며 우주 만유를 서정적으로 노래한, 대표적인 서정시인 정호승(71). 압도적인 시대에 눌려 외면받거나 기피되거나 그래서 고갈될 때에도 끝내 서정시를 외면하지 않았던, 약 반세기를 이어온 정호승의 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이 출간됐다.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를 비롯해 시대의 질곡과 어둠을 어루만진 ‘서울의 예수’(1982)와 ‘새벽편지’(1987), 속 깊은 서정으로 사랑을 받았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와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지난해 출간된 ‘당신을 찾아서’ 등 13권의 시집에서 시인이 직접 가려 뽑은 시 275편을 엮었다.

시인의 지향을 분명히 드러낸 데뷔작 ‘첨성대’부터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부치지 않는 편지’, ‘봄길’, ‘수선화에게’ 등 친숙한 그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적지 않는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됐는데.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부치지 않는 편지’ 부문)

탄생하는 존재의 필멸을 담담하게 노래한 시 ‘부치지 않는 편지’는 백창우의 곡을 바탕으로 작고한 가수 김광석에 의해 노래로 불렸다. 처음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씨 추모곡에서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과 노회찬 전 의원 등의 추모곡이 됐다. 살아 있는 존재들의 외로움을 노래한 시 ‘수선화에게’ 역시 이지상의 곡으로 가수 양희은이 노래로 불렀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수선화에게’ 전문)

시인의 시는 때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지친 현대인들을 달래주기도 했다. 지난해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린 개천절 경축행사에서 아이돌 출신 강 다니엘이 낭독한 것은 그의 시 ‘봄길’이었다, 고난과 절망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노래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사랑이 끝나는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봄길’ 부문)

삶에 기반해 더 단단해지고 더 정갈해진, 2000년대 이후 시들도 맛볼 수 있다. 단색의 희망이 아닌, 절망까지 껴안은 희망을 노래한 시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는 또 어떤가.

“나는 절망이 없는 희망을 거절한다/ 희망은 절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이다/ 희망만 있는 희망은 희망이 없다/ 희망은 희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보다/ 절망의 손을 먼저 잡는 것이 중요하다”(‘나는 희망을 거절한다’ 부문)

요컨대 정호승의 시들은 품 넓고 깊은 서정을 노래하는데, 그 서정이라는 것도 결국 인간과 공동체로, 그것도 가장 낮고 힘없는 자들을 위무하고 격려하고 있었다. ‘―에게’와 ‘―위하여’라는 표현이나 ‘―하라’, ‘―마라’ 등의 종결 어미가 유독 많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아니겠는가.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읽어보면 그가 왜 시선집의 표제작으로 했는지 이해갈 것이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내가 사랑하는 사람’ 부문)

시선집은 이미 2014년 출간된 동명의 시선집 개정증보판이지만 무려 130편 이상의 시가 교체되거나 새로 실렸다. 발표순으로 실려 있어 시인이 걸어온 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시선집 뒤쪽에는 시인 김승희와 문학평론가 이숭원의 해설이 담겼다. 김 시인은 “정호승의 텍스트는 자주 낯익은 것에서 출발하되 선시처럼 ‘단번에’ 낯익은 진부함을 처단하고 ‘단숨에’ 새로운 미지로 뛰어오르게 하는 그 순간의 명멸에서 하나의 깨달음을 준다”며 “그는 그렇게 낯익은 것에서 낯선 것의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 아주 오래된 시인이자 동시에 아주 새로운 시인”이라고 평했다.

1950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 정호승은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차례로 당선돼 등단했다.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기도.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상화시인상, 가톨릭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받았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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