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한다.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를 지켜보면서 “‘쌍둥이 자매’가 대표팀에 있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 적이 꽤 많았다.
세터 염혜선의 토스가 불안정해 김연경이나 다른 공격수들이 강타를 때리지 못하고, 연타나 페인트를 넣을 때. 다른 팀들은 레프트 공격수의 중앙 후위 공격도 뻥뻥 때려대는 데,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토스가 레프트 전위로 공이 올라갈 때. 그래서 상대 블로커들이 대놓고 전위 레프트로 몰려가 우리 공격을 막으려 할 때. 상대 서버들의 집요한 목적타 서브에 레프트 박정아의 리시브가 심하게 흔들릴 때. 그런 박정아를 대신해 코트에 들어간 이소영이 1m76의 단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공격이 상대 블로커에게 셧아웃당할 때.
그러나 여자배구 대표팀은 이재영-이다영 자매 없이도 2012 런던에 이어 2020 도쿄까지, 9년 만에 ‘4강 신화’를 이룩해냈다. 6일 열리는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승리하면 1976 몬트리올 동메달을 뛰어넘는 한국 여자배구의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써낼 수 있다.

◆ 한때 여자배구 세대교체의 주축이었던 쌍둥이들
2016 리우 올림픽 이후 이재영-이다영 자매는 한국 여자배구의 세대교체 주역으로 활약했다. 이재영은 리우에도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지만, 리우 땐 김연경의 대각 파트너 자리에서 확실한 주전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주로 박정아가 주전으로 뛰었고, 이재영은 백업 역할을 맡았다. 이다영은 리우 때 최종엔트리에서 고배를 마셨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2019년 여자배구 대표팀 역사상 첫 외국인 사령탑으로 부임하면서 이재영-이다영 자매를 대표팀의 중심축으로 활용했다. 특히 이다영은 김사니, 이숙자, 이효희 등 오랜 기간 대표팀의 코트 위 사령관 역할을 해왔던 1980~81년생 ‘세터 트로이카’의 뒤를 이을 주전 세터로 낙점됐다. 1m79의 세터치고는 큰 키로 전위에 올라왔을 때도 상대 공격수들의 타깃이 되기는커녕 왕왕 블로킹을 해냈고, 토스의 기복도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쌍둥이 자매가 학폭 논란에 휩싸이면서 대표팀 유니폼을 입을 수 없게 됐고, 이는 곧 이번 올림픽에 나서는 여자배구 대표팀의 전력 약화로 연결됐다. 김희진이나 김수지도 부상으로 빠지긴 했지만, 두 선수가 빠진 뒤 치른 도쿄올림픽의 모의고사격인 국제배구연맹(FIVB)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선 3승12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며 16개국 중 15위로 마치기도 했다.
◆ 올림픽 뚜껑을 열자 반전이 시작됐다
반전은 올림픽 무대에서 펼쳐졌다. 조별예선 탈락 혹은 잘해야 조별예선 통과까지가 마지노선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승승장구한 것. 완벽하진 않아도 끈끈한 경기력을 앞세워 조별예선은 마지막 경기인 세르비아전을 치르기도 전에 8강 진출을 조기에 확정했다. 확실한 1승 상대로 생각했던 케냐는 3-0으로 잡아냈고, 두 팀 중 하나를 잡아 조별예선 통과 상대로 삼으려 했던 도미니카공화국과 일본은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이겨냈다.
8강에서 만난 터키는 신체조건에서나 객관적인 전력에서 한참 앞서는 상대였다. 터키전 이전까지 한국의 세계랭킹은 13위. 터키는 4위였다. 상대전적도 2승7패로 밀렸다. 게다가 터키는 2016 리우 여자배구 금메달리스트인 중국이 탈락한 B조에서 3승2패를 거두며 살아남은 팀이었다. 김연경의 ‘라스트 댄스’가 8강에서 멈춰설 것이란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번 올림픽 ‘5세트 불패’의 면모를 과시하며 터키마저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집어 삼켜버렸다. 조별예선 때 보였던 끈끈한 경기력이 결코 상대의 부진이나 우연 등이 섞인 ‘행운’이 아닌 ‘실력’임을 입증해내는 한판이었다.

◆ 반전의 원동력은 선수 개개인의 장점 극대화
여자배구 대표팀이 반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수 개개인의 장점을 극대화해 똘똘 뭉치며 ‘원팀’으로 태어난 덕분이었다. 김연경이 올림픽 기간 인터뷰 내내 언급했던 ‘원팀’은 드디어 완성됐다. 그리고 그 상징 같은 선수가 레프트 박정아다.
지난 2016 리우 8강 때 네덜란드의 목적타 세례에 심하게 흔들리면서 강점인 공격까지 흔들렸던 박정아. 5년이 지난 현재는 한층 성숙해졌다. 여전히 리시브는 약점이지만, 예전처럼 리시브가 흔들린다고 공격까지 흔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2016 리우에 비해선 리시브도 크게 개선됐다. 그 비결은 선수 본인의 성장도 있지만, 주변 동료들과 감독들의 끊임없는 격려다. 코트 위 언니들과 라바리니 감독은 “(박)정아야, 넌 리시브하려고 코트에 들어간 게 아니라 공격하러 들어간거야. 득점으로 만회하면 돼”라며 박정아의 멘탈이 흔들릴 때마다 다 잡아주고 있다.
그 덕에 평소 클러치 상황만 되면 결정적인 득점을 올려줘 ‘클러치박’이란 별명이 붙은 박정아 특유의 공격력이 이번 올림픽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이제 배구팬들은 박정아가 클러치 때만이 아니라 ‘항상’ 잘 해주기 때문에 ‘올웨이즈박’이라고 바꿔불러야 한다며,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고 있다. 5년 전 네덜란드전 패배 이후 배구팬뿐만 아니라 전 국민적인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박정아는 더이상 없다.
세터 염혜선도 이따금 토스가 흔들리긴 하지만, 과거 현대건설에서 호흡을 맞춘 적 있는 양효진과 김수지의 센터진의 공격을 활용하며 상대 블로커들을 흔들고 있다. 흔들림이 심한 서브로 상대를 괴롭히고 있다. 염혜선은 “V-리그 공인구인 ‘스타’에 비해 국제대회 공인구 ‘미카사’가 내 서브 구질을 더 까다롭게 해주는 것 같다”고 그 비결을 밝혔다.
주전뿐만 아니라 백업 선수들도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양효진과 김수지의 뒤를 받치는 백업 센터 박은진은 터키전 5세트 10-10에서 서버로 나섰고,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그의 플로터 서브가 상대 리시브를 두 번이나 흔들었고, 두 번 다 곧바로 넘어온 공을 김연경이 다이렉트 킬을 성공시키며 12-10으로 달아났다. 여기에서 이날 승부가 결정된 셈이다. 박은진과 함께 대표팀 막내인 정지윤은 라이트와 레프트를 가리지 않고 ‘언니’들이 흔들릴 때면 투입되어 득점포를 가동한다. 표승주, 이소영도 박정아가 흔들리는 타이밍 때 코트에 들어가 알토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물론 나머지 11명의 활약이 승리로 연결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늘 푸른 소나무’처럼 공격과 수비에서 언제나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는 김연경이 있기에 가능하다. 세계 여자배구계에서 김연경만큼 공격을 하는 레프트 공격수는 있다. 김연경만큼 리시브가 능한 레프트도 있다. 다만 이를 동시에 해내는 선수는 오직 김연경뿐이다. 동료들의 능력을 고무시키는 특급 리더십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배구선수다. 오죽하면 국제배구연맹(FIVB)도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김연경에 대해 ‘우리는 말하고 또 말해왔다. 김연경은 10억명 중 1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고 표현할 정도겠는가.
여자배구 대표팀의 ‘위대한 여정’은 6일 오후 9시부터 펼쳐지는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계속 된다. 이미 도쿄에서 전설을 써낸 여자배구 대표팀이 또 다시 기적을 써내며 내친김에 결승 진출까지 이뤄낼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제 여자배구 대표팀에 더 이상 쌍둥이들의 ‘그림자’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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