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長津)의 일본식 발음 ‘초신’으로 각인
“산과 계곡, 그리고 논에서 숱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인천에서, 장진호(Chosin Reservoir)에서, 단장의능선(Heartbreak Ridge)에서, 또 부산을 둘러싼 낙동강 방어선에서 목숨을 바친 그분들의 용맹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68주년을 맞아 26일(현지시간) 발표한 포고문 일부다. 1950년 9월 역사적 상륙작전이 펼쳐졌던 인천, 1951년 9∼10월 강원도 양구 일대에서 벌어져 많은 미군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단장의능선 전투 외에 장진호를 언급한 점이 눈길을 끈다.
바이든 대통령이 쓴 ‘Chosin Reservoir’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초신 저수지다. 함경남도 개마고원 남쪽에 있는 장진호는 원래 호수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그 부근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며 생겨난 거대한 인공호수이기 때문에 호수 대신 저수지(Reservoir)라고 표현한다. 그럼 장진은 왜 실제 발음과 달리 초신(Chosin)으로 표기되는 걸까.
장진호는 1950년 11∼12월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미 해병대와 중공군이 2주일간 사투를 벌인 장진호 전투의 무대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두만강을 향해 북진하던 미 해병대는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장진호 일대까지 진격했다. 그곳에 매복해 있던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내세워 대대적인 기습을 가하고, 이에 허를 찔린 미 해병대가 반격과 동시에 다급한 퇴각에 나선 것이 장진호 전투의 개요다.
당시 한국은 군사 작전에 쓸 지도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군 등 유엔군은 급한 대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제작한 한국 지도에 의존했다. 한자 장진(長津)을 일본어로 읽은 발음이 초신이다.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들 뇌리에 그 처참했던 싸움터 이름이 초신으로 각인된 이유다.
오늘날에도 미 해병대에는 ‘초신 퓨(Chosin Few)’란 말이 남아 있다. 초신(장진호)에서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선택된 소수정예를 일컫는 말이다. 초신의 발음이 ‘선택됐다’는 뜻의 영어 단어 초즌(Chosen)과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해 만들어진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미 해병대는 2017년 버지니아주(州) 콴티코 국립해병대박물관 경내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우며 영어 대문자로 ‘장진(JANGJIN)’을 새긴 뒤 옆에 괄호 하고 ‘초신(CHOSIN)’을 병기했다. 그해 6월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장진과 초신이 나란히 적힌 이 기념비를 찾아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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