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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서교동 헌책방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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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7-16 22:57:01 수정 : 2021-07-16 22: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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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서 홍대 쪽 좌회전 길목 ‘우뚝’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는 고서점

논문 한 편 쓰는 일이 급한데도 마음은 자꾸 딴청을 부리려 한다. 그 논문 주제가 하필이면 어느 시조 시인에 관한 것인데, 그러자 예전에 서교동 헌책방 생각이 난 것이다.

신촌 로터리에서 홍대 쪽으로 좌회전하는 길목에 이 헌책방이 ‘우뚝’하니 서 있다. 거기 2층에 논문과 관련해서 참고 될 만한 책이 있을 것 같은 어림짐작이다. ‘세상의 모든 책은 사람이다’라는 이 책방은 지상 2층 지하 1층이나 되는, 서울에서 내가 본 헌책방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크기도 크다 보니 이 책방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빼놓고는 다 있다. 현대문학 전공자 입장에서 보면 제법 오래된 책도 가끔 나오는 데다 포괄하는 분야도 거의 모든 방향을 망라한다.

일제 때 출판된 김삿갓(김립) 시집이 얼른 눈에 띈다. 서정주의 ‘떠돌이의 시’는 옛날에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책값도 다른 사람 책 오르는 것만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윤백남 소설책도 한 권 여기 있었는데 오래 안 오는 사이에 팔려간 것 같다. ‘도산 안창호’는 이광수가 쓴 것인가 하고 봤더니 ‘속편’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비닐 커버를 벗기고 살펴보니 6·25 전쟁 후에 흥사단에서 낸 것이다. 이광수가 쓴 책을 고려해서 붙인 부제인 듯하다.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라는 책도 있어 흥미를 끈다. 여기서 비석은 소설가 정비석을 말함이다. 이름난 수필 ‘산정무한’과 함께 다른 산문이 실려 있다. 이방자 여사 자서전 ‘바람 부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는 사고 싶기는 하지만 ‘김삿갓 시집’과 함께 가격이 엄두가 나지 않을 것 같다.

몸을 돌려 카운터 맞은편 서가를 둘러볼 차례다. 여기에도 가끔 좋은 책이 있다. 박인환이 세상 떠나고 한참 있다 나온 시집 ‘목마와 숙녀’는 재판이지만 가끔 인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진상이다-백범 김구 선생 암살 폭로기’라는 책도 요즘 이광수와 김구의 관계에 관심이 있던 차다. 1990년에 나온 잡지 ‘여성과 사회’ 창간호도 요즘 학생들이 그때 잡지 흐름에 관심이 있으니 장만해 둘 만하다.

책을 구경하다 보니 이제 필요한 책 생각은 멀리 달아나고 서가를 따라 한 층 전체를 둘러보게 된다. 안쪽으로, 안쪽으로 파고 들어가니 예전에 안 보이던 평전이며 자서전 같은 책이 눈에 들어온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평전’은 언제 나왔는가? 가격 매겨 놓은 것을 보니 8000원이다. 싸다. 그 옆에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임종국 평전’도 꽂혔는데, 이건 또 5000원이란다. 그 옆에는 ‘스콧 니어링 자서전’, ‘체 게바라 평전’, 또 그 옆에는 ‘히틀러 평전’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참 기묘하게도 여기서 만나 나란히 섰다.

이런 책 말고도 엄청나게 쌓인 1층 책을 천천히 둘러보다 2층으로 향한다. 위층에 종교 관련 서적이 있기 때문이다. 안 와 본 지 1년은 되지 않았나 싶다. 교통편이 다소 불편한 탓이 컸지만 그사이 나도 어지간히 경황이 없었다. 가겟세 무서워 이사 오셨다 했지만 이쪽으로 와서는 한 층밖에 없던 책방이 오히려 세 개 층이나 차지하는 ‘발전’을 했다. 하지만 그 많은 월세를 내려면 얼마나 많은 책을 팔아야 할 텐가.

2층의 불교 서적 꽂혀 있는 서가 쪽으로 향하며 나는 옛날 일을 하나 생각한다. 바로 그 서가 자리에 내가 아는 어떤 시인의 책이 나와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지금도 좀 숨겨두고 싶다.

내가 찾던 책이 뭐였더라? 나는 여기서도 찾던 책 대신에 1980년대에 창간된 불교 잡지 두 권을 골라 놓고서야 비로소 불교의 선문답에 관해 참고할 만한 책을 찾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옛날에 ‘깨침의 미학’이라고 참 흥미로운 책이 여기 어디쯤 꽂혀 있었던 것이다. 거기 그런 문장이 있었다. 선문답은 굶주린 자에게서 밥을 뺏고 추위에 떠는 자에게서 옷을 벗기는 것과 같다는. 오늘 그 역설의 뜻을 꼭 되짚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배고파진다. 해가 벌써 서녘으로 훌쩍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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