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영웅 비극 ‘코리올라누스’… 독보적 연기 보여준 남윤호

입력 : 2021-07-12 03:00:00 수정 : 2021-07-11 09:55:1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여기 영웅이 있다. 누구보다 고결하며 용맹하다. 적진에 홀로 뛰어들어 승리를 가져오고 조국을 구했다. 값진 전리품을 부하에게 돌리고 대신 영예스러운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오만하다. “용기도, 진실함도 없다”고 민중을 조소한다. 자신을 기꺼이 영웅으로 숭배하고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그들에게 인사만으로도 충분할 아첨 대신 독설을 퍼붓는다. 타인의 찬사, 지지가 필요 없는 완고하나 고독한 존재다. 당연히 그럴 자격을 지녔으나 결국 그러한 오만이 그를 몰락시킨다. 

 

내년에 마곡으로 옮겨가는 LG아트센터가 역삼 시대 마지막 작품으로 역시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인 ‘코리올라누스’를 무대에 올렸다. 폭동의 시절에 쓰인 희곡답게 너무나 정치적이어서 한때 프랑스에선 공연이 금지됐을 정도다. 이런저런 이유로 좀처럼 공연되지 않으나 시인 T.S 엘리엇이 “ ‘햄릿’보다 우월하다”고 평가한 고전.

LG아트센터 역삼 시대 마지막 작품인 연극 ‘코리올라누스’. 성벽 밖에서는 외적이 위협하고 안으로는 민주주의가 태동하던 격동의 로마 시대를 그린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비극에 현대적 색채를 입혔다. 용맹하고 애국심이 투철한 엘리트이지만 오만함과 시민들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몰락하는 영웅 비극이 펼쳐진다. LG아트센터 제공 

그래서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 양정웅’, ‘천재 뮤지션 장영규’, 그리고 ‘배우 남윤호’라는 강력한 흥행카드가 모인 이번 무대는 원작이 지닌 깊이와 재미를 충분히 살려냈다. 

 

코리올라누스가 여덟 번째 셰익스피어 연출작인 양정웅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였던 원작 배경을 현대로 옮겨왔다. 군인들은 창과 방패 대신 총과 방탄조끼, 방독면으로 무장했다. 거리에선 확성기를 든 선동가가 데모를 일으킨다.

 

그 앞에 선 주인공 코리올라누스는 최고권력을 잡으려는 참전용사. 하지만 ‘전사’에서 ‘정치가’로 변신하는 게 그에겐 쉽지 않다. 유권자를 향한 가식적이나 꼭 필요한 언행을 코리올라누스는 거부한다. 수많은 전장에서 생긴 전신의 상흔을 전쟁영웅으로서 지지층에 꼭 보여줘야 하는 전통도 완강히 거절한다. 게다가 민중의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때로는 비열한 속성을 지적하는 거친 언사와 전통 무시는 결국 민중 분노를 촉발한다. 그래서 권좌에 앉는 대신 추방령을 받아든 코리올라누스는 자신이 여러 차례 섬멸했던 로마의 적 볼스키 군에 가담해 조국을 향해 칼을 든다.

오만한 엘리트, 그리고 참과 거짓을 섞은 선동에 쉽게 부화뇌동하는 시민,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결국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선동가. 어느 시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영감을 얻은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선 코리올라누스를 싸움은 잘하나 어머니와 부인 호소에 큰일을 그르친 나약한 인물로 묘사한다. 반면 히틀러는 자신을 코리올라누스와 동일시했다고 전해진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아예 ‘코리올란’이란 작품을 새로 썼다. 그 속에서 경멸당했던 민중을 적 앞에 뭉치도록 하고, 보수파에 매력적 영웅이었던 코리올라누스를 민중의 힘 앞에 좌절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으로 끌어내렸다.

 

양정웅의 선택은 균형이다. 현대극으로 겉모습은 바꾸었지만, 셰익스피어 원작이 지닌 비판의 균형점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다. 코리올라누스를 고결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보여주면서도 시민을 멸시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한 그의 오만한 성품을 감추지 않는다. 집요함으로 코리올라누스가 지닌 독선을 끄집어내 공화정을 지킨 호민관 씨시니우스와 브루투스는 그 후 권력이 가져다준 단맛에 단단히 도취한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빼면 5년 만에 무대에 복귀한 양정웅은 개막 전 언론 인터뷰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해석과 변주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 지점이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라면서도 “지금 와서 더 중요하게 느끼는 것은 ‘원작’ 그 자체다. 애초에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했던 본질, 그의 목소리…, 이런 것들을 관객과 공유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연출이 강조한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는 남윤호가 들려줬다. 4년 전 영국 왕립연극학교로 유학 간다며 훌쩍 국내를 떠났던 남윤호는 이번 무대에 어마하게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신을 내쫓은 조국에 칼을 꽂는 오만한 전사이면서도 어머니 간청에 무너지고, 꿋꿋이 서서 죽음을 맞이하는 코리올라누스 역을 완벽히 소화해서 영웅 비극을 완성했다. 특히 그의 독보적 발성은 그동안 쌓은 연기의 기본이 얼마나 탄탄한지 경탄하게 하였다. 자칫 장황하게 걷돌 수 있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가진 대사 특유의 미학이 그의 목소리로 살아났다. 마치 로마 시민을 바라보듯 객석을 향해 연설하는 모습은 ‘포효하는 사자’ 그 자체로 전율을 느꼈다.

“이 천한 개자식들아! 썩은 늪지에서 피어나는 독기 같은 네놈들의 숨결을 증오하고, 네놈들의 호의도 썩은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일 뿐이다. 내가 네놈들을 추방한다. 여기서 영원히 혼돈에 빠져버려라. 사소한 소문에도 네놈들의 두려움이 요동치고, 원수 볼스키 투구의 깃털이 바람에 나부껴도 절망에 몸부림쳐라. 선량한 수호자를 추방해버린 그 권력에 취해 최후엔 모든 이들을 적으로 만들거라. 그리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계략으로 너희를 무너뜨린 반란의 포로가 되어버려라. 네놈들로 인해 나는 이 로마를 경멸하면서 내 등을 돌리겠다. 세계는 또 다른 곳에도 있으니까.”

 

아직 배우로서 부친 유인촌이 전성기 보여줬던 카리스마와 존재감에는 못 미치나 그에 못지않은 대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남음이 있었다.

코리올라누스와 칼을 맞대고 몸으로 싸우는 명장면을 보여준 볼스키족 장군 오디피우스 역의 김도완, 코리올라누스의 후원자 메니니우스 역의 한윤춘, 변설로 민중을 선동하며 권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보여준 두 호민관 역을 맡은 한상훈과 김진곤 등 모든 출연진 연기가 훌륭했지만 그중 코리올라누스 모친 볼룸니아 역을 맡은 김은희 연기가 돋보였다.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려는 코리올라누스를 모친이 돌려세우는 대목은 중세 시대 여러 화가가 그렸을 만큼 중요한데 김은희는 남윤호와 완벽한 호흡으로 멋진 장면을 만들었다.  서울 LG아트센터에서 7월 15일까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