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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무장 황진 이야기

입력 : 2021-07-10 03:00:00 수정 : 2021-07-09 21: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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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이순신처럼 육지서 맹위
통신사로 日 방문… 조선 침략 확신
진주성서 조선군 6000명 이끌고
일본군 10만명에 맞서 악전고투
“팩트에 충실한 역사소설의 진수”
황진은 이치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 등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 일본군에 맞선 조선군 장수 가운데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이었지만 그간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왼쪽 사진은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기슭인 이치에 설치된 이치 전적비이고, 오른쪽 사진은 진주성의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임진무쌍 황진/김동진/교유서가/1만4000원

 

10여 년 전, 작가 김동진은 의열단 김상옥에 관한 책 ‘1923 경성을 뒤흔든 사람들’을 펴내면서 ‘의열’의 연원과 용례를 알아보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했다. 수백여 개의 검색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는데, 검색 내용을 살펴보다가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싸움과 함께 그곳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 이 몇 사람들은 평소의 역전한 공만으로도 이미 높여 줄 만한데, 함께 한 (진주)성에 있으면서 죽음으로 지켜 떠나지 않았고, 성이 함락되던 날 의열(義烈)이 이와 같았으니, 아울러 특별히 포상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

 

‘의열’이라는 단어는 그를 400년 시간의 벽을 거슬러 임진왜란의 빛나는 무장 황진으로 이끌어 갔다. 사료와 자료를 통해 공부하면 할수록 놀라운 인물이었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황진’이라는 표현처럼, 황진은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 일본군에 맞선 조선군 장수 가운데 최고의 무장이었다.

 

그러니까,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준비하던 1590년 3월, 황진은 조선 통신사의 호위무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국서를 전달하는 한편 일본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도요토미가 반드시 침략해올 것으로 확신한 그는 조총과 일본군 훈련 모습을 꼼꼼히 관찰했으며, 귀국할 땐 몰래 왜검을 사서 왜검법도 익히며 도요토미 군대의 침략에 대비했다.

김동진/교유서가/1만4000원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마침내 발발하자, 동복현감이던 황진은 자신이 훈련시킨 부대원들을 데리고 참전했다. 7월, 전주성 인근의 안덕원에서 야영 중이던 6000여명 규모의 일본군 안코쿠지 부대를 기습해 타격을 입혔고, 이어서 이치전투에선 2000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1만5000명 규모의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군의 공격을 물리쳐 호남지역을 지켜내는 공을 세웠다. 이듬해 3월에는 일본군의 주요 보급로상에 위치한 경기도 안성의 죽주산성을 지략을 써서 빼앗아 일본군 보급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다.

 

6월, 황진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운명의 진주성에 들어갔다. 당시 진주성은 도요토미의 지시에 따라 명과의 휴전협상을 앞두고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지난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도 설욕하겠다며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모리 히데모토 등 주요 장군들과 10만 명의 일본군이 출병을 앞둔 상황. 권율 장군은 진주성에서 관군을 철수시켰고, 의병장 곽재우조차 진주성 수성 싸움의 무모함을 지적하며 현실적인 선택을 권유했음에도, 그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그는 고립된 진주성에서 6000여명의 조선 병사들을 이끌고 10만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또 싸웠다.

 

“… 생사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싸운다는 극한의 심리 상태였다. 그들이 오로지 신경 쓰는 것은, 자신들만 바라보고 있는 저 불쌍한 6만여 명의 진주성 백성들이었다.”

 

일본군 역시 진주성 전투에서만 무려 1만 명 이상 숨지는 등 개전 이래 단일전투로는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10만 대 6000. 결국 2차 진주성 싸움 7일째인 6월28일, 황진은 일본군의 저격병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 하루 뒤 진주성 역시 악전고투 끝에 함락되고 말았다.

 

역사소설 ‘임진무쌍 황진’은 1590년 3월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부터 1593년 6월 28일 진주성에서 전사할 때까지 무장 황진의 가장 뜨거웠던 3년을 되살렸다. 작품은 이순신과 해전 중심의 임진왜란 이해를 넘어 육전과 다양한 인물들로 시야를 확장해주는 데다 사건과 본질에 집중함으로써 사건 전개가 빠르며, 박진감 넘치는 육전 특유의 묘미도 만끽할 수 있다. 특히 상상력이 과잉한 기존 역사소설과 달리 팩트에 충실한 역사소설의 진수를 맛볼 수도. 작가는 이를 위해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징비록’, ‘난중잡록’, ‘강한집’, ‘국조보감’, ‘포저집’ 등 많은 사료를 헤집고 다녀야 했다.

 

왜 황진을 기억해야 할까. 김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황진이 후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란 시간이란 전장 속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기억의 전쟁’이다. 한편에선 잊기 위해서, 다른 한편에선 기억하기 위해서 처절하고 집요하게 몸부림을 친다. 시간은 원래 망각의 편인지라, 자연스러운 세월의 흐름 속에 누구도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면 잊히기를 바라는 쪽이 결국에는 승리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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