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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페인 커피와 엿기름 [박영순의 커피언어]

입력 : 2021-07-03 19:00:00 수정 : 2021-07-03 09: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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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생두(왼쪽)를 물에 오랫동안 담가 카페인을 제거하면 녹색이 진한 갈색으로 바뀐 디카페인 커피 생두(오른쪽)가 된다.

커피 맛은 산지와 품종, 건조 방법 등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케냐 기차사이니 커피는 토마토 꼭지와 같은 생동감이 있고, 콜롬비아 킨디오 커피는 말린 고추씨의 뉘앙스를 풍긴다. 에티오피아 함벨라 하루 마을에서 자란 재래종(heirloom) 커피는 파치먼트 건조법을 거치면 끈적이는 듯한 구운 파인애플의 인상이 두드러지고, 체리 건조를 하면 꽃처럼 화사하고 복숭아를 한입 베어 문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듯 커피의 정체성은 속성(attribute)을 담은 다양한 명사들을 통해 보다 명료하게 지각하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카페인 커피(Decaffeinated Coffee)의 향미적 특징을 대표할 만한 단어는 무엇일까? 답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가지 조건을 맞춰야 한다.

첫째, 어떤 커피를 사용했냐는 점이다. 디카페인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핵심적인 이유는 재료가 좋아진 덕분이다. 4~5년 전만 해도 디카페인 커피는 카페인에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대안 커피’의 성격이 강했다. 기업들이 대부분 값싼 카네포라 종(주로 로부스타 품종)을 사용해 카페인을 제거한 뒤 팔았기 때문에 맛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고무나 플라스틱, 젖은 종이 냄새들이 부각되는 바람에 생두 본연의 향미를 살리기보다 진하게 볶아 소위 ‘불맛’으로 단점을 가리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향미에 눈을 떠 맛과 품질을 따지기 시작하자, 값을 더 치르고 향미가 풍성한 아라비카종을 사용하는 디카페인 커피 생산자들이 늘고 있다.

둘째, 생두에서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따져야 한다. 페인트나 매니큐어를 지우는 데 쓰는 염화메틸렌과 같은 화학물질로 카페인을 빼내는 방식은 찜찜하다. 생산자들은 잔유물이 몸에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니며 안전하다는 인증을 받았다고 홍보하지만, 화학물질을 사용하지 않은 것보다 좋다고 말할 순 없다. 비용이 들더라도 커피에 화학물질이 남지 않도록 물을 이용해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소비자들의 건강에 유익하다. 물보다 더 큰 비용이 드는 방식이 초임계 이산화탄소로 단시간(10분 안팎)에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디카페인 커피에 관한 여러 관능평가에서 이 방법을 거친 게 가장 맛이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가공시간이 짧아 소실되는 향미성분들이 눈에 띌 정도로 적기 때문이다.

위 2가지를 따지지 않고 디카페인 커피가 맛이 좋다거나 달다고 단정하는 태도는 아쉽다. 디카페인 커피도 마땅히 산지와 품종, 건조법에 따라 맛이 다르다. 이 점을 감안한 전제 위에서 디카페인 커피의 향미적 특징을 한 단어로 압축하면 단연 몰트(malt)이다. 보리에 습기를 가해 발아시킨 뒤 말린 이것은 우리말로는 ‘엿기름’이다. 여기서 기름은 ‘기르다’는 순우리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름기와는 무관하고, 관능적으로는 구운 탄수화물의 느낌을 준다. 진한 누룽지 맛이 떠오르기도 한다. 스카치위스키의 몰트향, 샴페인에서 감지되는 잔류 효모향, 비스킷의 토스트 뉘앙스가 디카페인 커피의 관능미와 통한다. 좋은 디카페인 커피를 한 모금 삼킨 뒤 맛이 그려내는 이런 이미지들이 커피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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