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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회화기법 파괴한 렘브란트… 빛이 어둠을 이기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1-07-03 16:00:00 수정 : 2021-07-03 09: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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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야경’ 과학기술로 다시 보는 예술

네덜란드 라익스미술관 대표적 소장품
렘브란트 작품 ‘야경’ 300년 만에 공개
첨단과학과 협업해 복원 온라인 전시
빛과 어둠 대비 통한 다양한 그림 선봬

진부한 종교화·역사화 대신에 새 시도
평생 남긴 100여점 자화상엔 삶 흔적
얼굴의 선·명암 어떻게 변하는지 실험
AI기술 활용 당시 그림 살려내 큰 감동
렘브란트의 대표작에는 대부분 사람이 있지만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돌다리가 있는 풍경’(1638). 라익스박물관 제공

#팬데믹에 익숙해진 온라인을 통한 삶

최근 교육부는 2학기부터 대면수업을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학 역시 실험과 실기 수업 우선으로 제자리를 찾기로 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만에 기다리던 결정이었다. 하지만 막상 결정을 듣자 예상만큼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도 모두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낯설었던 화상회의에 익숙해지며 효율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큰 이유였다. 같은 맥락으로 IT업계에서는 팬데믹 이후에도 재택근무를 지속하겠다는 회사도 생겼다. 지난 몇 년간 시간을 중심으로 적용된 유연 근무가 이제는 장소로 확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인간의 상황 적응과 활용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화상회의를 통한 수업, 근무만큼 온라인 문화생활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기회 제공을 위해 미술 기관들은 과학과의 협업에 앞장서고 있다. 작년부터 3D 공간 스캐닝으로 전시장을 온라인에 재현해내는 다양한 시도들이 펼쳐졌다. 해외 전시를 온라인으로 찾아보는 일이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런 덕분에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인 라익스미술관(Rijksmuseum)의 소중한 프로젝트를 목격했다. 미술관은 얼마전 대표 소장품인 렘브란트의 ‘야경’ 전체 모습을 300여년 만에 공개했다. 이 모습을 창출해낸 과정과 결과물의 감상을 어느 때보다 친절하게 온라인으로 전시했다.

젊은 시절 작가의 초상. 등 뒤에 창문이 있는 것을 유추하게 만들 정도로 빛을 잘 반영했다. ‘자화상’(1628).

#빛의 화가, 렘브란트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서부 중앙 도시 레이덴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고 알려졌다. 라틴어 학교를 다녔으며 졸업 이후에는 부모의 권유로 지역 명문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미술을 향한 관심이 깊어져 학교를 그만두었다. 지역에 공방을 둔 야콥 반 스바넨부르크(Jacob van Swanenburgh)의 작업실에서 도제생활을 시작했다. 스바넨브르크로부터 3년간 사사를 하며 회화의 기본을 익혔다. 이후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겨 유명 화가였던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의 작업실에서 또 다른 도제생활을 했다. 단지 반년여의 시간을 보냈지만, 회화에서 빛의 역할을 배울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이용하는 카라바지오 등을 알게 되었다.

1626년,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고향 레이덴으로 돌아왔다. 귀향하자마자 동료인 얀 라이븐스(Jan Lievens)와 함께 공방을 열었다. 그는 이 공방에서 전형적 스타일에 화려한 색을 사용하는 종교화 등을 그리는 시도를 펼쳤다. 하지만 종교화 같은 대형작품 대신 초상화 의뢰가 더 자주 들어왔다. 렘브란트는 초상화를 전형에서 탈피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기 시작해 명성을 얻었다.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같이 꼿꼿하지 않은 인물을 반영한 자세를 선택한 결과였다.

이렇게 렘브란트가 초상화로 성공한 것은 그간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처음 공방을 연 이후부터 그는 꾸준히 자화상을 그렸다.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고 그것을 화폭에 옮겼다. 신진 화가가 팔 수 없는 자화상을 지속해 그리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무의미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자화상 작업은 표정이 달라지면서 얼굴의 선과 명암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익히는 실험과 같았다. 얼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던 그는 표면을 지나 내면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렘브란트는 평생 부유했지만, 말년에는 과소비로 파산하고 저택 등을 몰수당했다. 평생 남긴 100여점의 자화상에는 미술에 실험과 삶의 흔적이 모두 담겼다.

초상화로 성공적인 작가활동을 시작한 그는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1631년 화상인 헨드리크 반 오일렌부르크의 집에 우선 자리를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암스테르담 외과의사 조합의 의뢰를 받아 작업을 시작했다. 렘브란트의 주요 작품 중 하나인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962)다. 이 작품은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해부학 강의를 듣는 이들의 단체 초상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빛을 사체와 툴프 박사가 있는 중앙에 배치했다. 빛이 비치는 작은 면적을 제외한 나머지는 어둡게 칠했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욱 그 힘을 발해 인물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인물에 집중하게 하는 특유의 방식은 그의 이름을 암스테르담에서도 알렸다. 렘브란트는 이제 상인을 넘어 귀족들의 초상화 제작까지 독점하는 화가가 됐다. 이러한 입신 속에 그는 큰 규모의 공방을 열었고 성 루가의 길드에 가입해 제자를 양성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일찍이 바랐던 대형 종교화와 역사화 의뢰도 받게 되었다. 대범한 회화적 시도는 뛰어난 실력이 뒷받침하여 작품세계를 더 빛나게 했다.

렘브란트가 전성기에 그린 ‘야경(The Night Watch)’(1942). 야간 순찰을 의미하는 ‘야경’으로 불리나 본래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덴 부르크의 민병대’. 라익스박물관 제공

#야경,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덴 부르크의 민병대

‘야경(The Night Watch)’(1942)은 렘브란트가 전성기에 그린 작품이다. 그의 작품세계 전체를 대표하는 주요 작품이자 가장 큰 작품이기도 하다. 야간 순찰을 의미하는 ‘야경’으로 불리나 본래 제목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덴 부르크의 민병대(Officers and other civic guardsmen of District II in Amsterdam, under the command of Captain Frans Banninck Cocq and Lieutenant Willem van Ruytenburch)’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 민병대에서 본부 건물에 거는 목적으로 의뢰해 그려졌다. 민병대는 14세기에 조직된 이래 치안을 담당하며 도시를 지키는 이들이었다. 17세기 들어 그들은 일요일마다 시가지를 행진하며 도시 곳곳을 살피는 동시에 위용을 떨쳤다. 작품은 이러한 장면을 그려내어 그 안에 초상과 우화를 담은 역사화로 태어났다.

화면의 가운데에는 위세가 느껴지는 두 남성이 있다.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은 화려한 외형을 가졌다. 왼쪽의 남성은 벨벳으로 추정하는 검정 옷, 오른쪽의 남성은 실크로 추정하는 황금빛의 옷을 입었다. 귀족이 입었던 것으로 알려진 상의 더블릿을 입고 그 위로 벨트를 둘렀다. 다른 이들과 구분되는 모습으로 보아 두 남성은 작품 제목에 등장하는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과 중위 빌럼 반 루이덴 부르크일 것이다. 이 두 남성의 주위는 군중이라고 부를 법한 수의 인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칼 창과 총을 든 대원들과 이들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개중에는 북을 멘 채 모든 순간순간에 위세를 더하는 사람도 있다. 이 모든 인물 사이에서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한 소녀다. 예닐곱 살이 되어 보이는 소녀는 무리의 가장 앞에서 황금빛 드레스를 입고 서 있다. 어깨에 무엇인가를 매달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닭이다.

이 그림의 모델은 바닝 코크 대장과 루이덴 부르크 중위 그리고 16명의 대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상적인 점이 있다면 기존의 부대 또는 단체를 기념하는 작품과 다른 모습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보통 이러한 부류의 작품은 주요 인물이 가운데 서고 그 뒤로 나란히 그 외 인물들이 선 채로 그리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경우 배경이 되는 장소는 대리석으로 완성하거나 대형 실크 커튼이 있는 화려한 곳이다. 렘브란트는 회화 속 장면을 실감나는 현실세계에서 선택해 이러한 구성을 깼다. 대원들이 대열을 정비하는 듯한 이 순간은 소란스러울지언정 기존 역사화에서 볼 수 없던 역동성을 전한다. 초상화로 이름을 알린 렘브란트가 묘사한 인물들은 모두 생동감 있게 움직인다. 기념사진처럼 인물을 나란히 배치하던 기존의 단체 초상화를 무색하게 만든다.

이렇게 활력 넘치는 장면이지만 보는 이는 산만하기보다 집중하게 된다. 화면의 중심부에 시선을 두었다가 찬찬히 주변으로 그것을 옮기며 살핀다. 이는 렘브란트의 빛과 어둠의 활용이 그 절정에 달했기 때문이다. 빛은 화면의 가운데서 바닝 코크 대장과 루이덴 부르크 중위를 강렬하게 비춘다. 이 빛 덕분에 수많은 등장인물 중 두 사람은 중심이 되어 화면을 정돈한다. 보는 이는 빛이 퍼져 나가는 방향을 따라 찬찬히 시선을 움직이게 된다. 가장 밝은 곳부터 가장 어두운 곳까지 향하면 그 어느 때보다 작품의 면면에 집중하는 경험을 한다. 렘브란트의 빛이 가진 힘이다. 화면 속에서 바닝 코크 대장과 루이덴 부르크 중위 외에 빛이 향하는 곳이 있는데 이는 소녀다. 소녀가 멘 닭은 민병대의 상징이기에 우의적 인물을 추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빛은 상징을 향하고 상징은 주변과 함께하며 완전한 하나로 거듭난다.

#‘야경’, 과학기술을 통해 다시 보는 예술

‘야경’은 렘브란트의 절정기에 탄생한 이후 수많은 사건과 에피소드에 휘말렸다. 일례로 작품은 ‘야경’이라고 지금까지도 불리지만 사실 그림은 밤의 풍경이 아니다. 하지만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 보존의 문제로 그림 위에 노란색 유약을 바른 것이 원인이었다. 작품은 점차 어둡게 변했고 밤의 모습같이 보이며 ‘야경’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작품은 암스테르담 시청사로 옮기며 사면이 잘려지는 아픈 기억을 가졌다. 이후에도 고난은 멈추지 않았는데 나치 침공 당시에는 북해 연안의 지하실에서 철제 원통에 보관했다. 이 장소도 위험해지자 그림은 마스트리히트 근처 방공호로 옮겨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야경은 라익스박물관에 걸렸다. 그리고 여기서 두 차례의 습격을 더 받게 되었다. 1975년에는 한 남성이 코크 대장을 악마라 믿어 그림에 칼을 휘둘렀다. 시간이 흐른 뒤에 다른 인물은 소녀를 향해 산을 뿌리기도 했다.

이 중 가장 그림에 훼손이 컸던 일은 암스테르담 시청사로의 이동이다. 그림은 이때 두 개 문 사이의 빈 벽에 설치할 예정이었는데 그 면적이 좁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담당자들은 벽 크기에 맞춰 그림을 종이 오리듯 오려냈다. 특히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왼쪽 부분이 더 잘려 나갔다. 라익스미술관은 최근 AI 기술을 활용해 이 잘린 부분을 재현해냈다. 그림 훼손 전 작품을 모작했거나 잘린 부분이 포함된 장면을 그린 것들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에 앉아 컴퓨터 마우스를 몇 번 움직여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편리하기 그지없다. 고가의 기기로 촬영한 고해상도 이미지를 확대해 보니 실제 장소에서 보는 것보다 더 세부 감상이 편했다. 감탄을 내뱉으며 그림의 전체와 부분을 한참을 돌아가며 살펴보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네덜란드에서 보낸 여름이 머릿속에서 끝도 없이 떠오르는 요즘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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