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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정치인들의 무모한 욕심에 죽음 예상한 듯 “내 관뚜껑 닫지말라”

입력 : 2021-06-25 05:00:00 수정 : 2021-06-25 16: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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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련 우주비행사 코마로프의 죽음

소련 탄생 50년… 국력 뽐낼 이벤트 추진
세계 첫 우주 도킹·지구 귀환 미션 부여
전문가들 심각한 문제 지적 불구 강행
도킹 실패·귀환 중 낙하산 안펴져 참사
“당신들이 무슨짓 했는지 똑똑히 보라”

항공우주기술 눈부신 발전… 안전 확보
세계적 갑부들 우주 진출 경쟁 불붙어
역사 속 우주인들 희생 있었기에 가능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비행사들. 왼쪽부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알드린. 워낙 위험한 임무였기 때문에 생명보험을 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최근 세계적인 갑부들 사이에 우주 진출 경쟁이 불붙었다. 과거만 해도 돈과 기술이 엄청나게 소요되지만 당장 투자비를 회수하거나 이윤을 낼 수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 기술은 정부 같은 공공영역에서 투자, 개발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근래 들어 세계가 경제적 양극화를 거치면서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갑부들이 탄생했고, 우주공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웬만한 로켓 기술은 민간에서도 개발할 엄두를 낼 정도의 단계에는 올라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나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정도는 되어야 자신의 꿈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베이조스는 머스크처럼 민간 우주기업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자신이 설립한 블루오리진에서 첫 유인 우주비행을 할 때 직접 탑승하겠다고 선언해서 화제가 되었다. 아마존의 CEO에서 물러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 세계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인 그가 우주선에 올라탈 만큼 로켓 기술이 안정적인 단계에 들었는지도 궁금하다.

생각해 보면 항공우주기술만큼 한 세대 동안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 기술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해변에서 첫 비행에 성공한 후 인간이 달에 착륙하기(1969년)까지 걸린 시간은 단 66년이다. 상상하기 쉽지 않은 속도의 발전이지만 그만큼 빨리 발전한 역사 뒤에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미국의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전기를 읽다가 등장하는 인물 주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이 있다. 항공여행은 자동차 여행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도 공항에서 여행자 보험을 팔지만, 1970년대만 해도 비행기를 타기 전에 생명보험을 사는 게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항공업계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항공산업의) 안전규정은 피로 씌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보일 만큼 반복적인 모든 절차가 사실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생긴 후 같은 사고가 반복되지 않도록 엄격한 조사와 실험을 통해 마련된 것들이다.

단순히 구름 위를 나는 항공기도 그랬으니 지구의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은 어땠을까. 우주탐험이 막 시작되던 1960년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알다시피 닐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우주비행사. 인간의 달 착륙은 지금도 쉽지 않지만 그때는 더더욱 위험했다. 당시 미 항공우주국 전체의 컴퓨팅 파워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에도 미치지 못했고, 많은 계산이 손과 머리로 되었고, 오류가 없는지 여러 차례 확인을 했다. 따라서 달 착륙선에 타는 우주인은 사망 가능성이 높았고, 그런 이유로 보험사에서 산출한 생명보험은 1년에 5만달러. 당시 닐 암스트롱이 받은 연봉이 1만7000달러였으니 지구에 남겨질 가족을 위해 생명보험을 사려고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와 동료 조종사들이 생각해낸 방법이 수백장의 편지봉투에 자신들의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한 후에 한 친구에게 맡긴 것이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발사 당일(1969년 7월16일)에 사고가 날 경우 그날 그 봉투들을 부쳐서 우체국에서 그날의 소인이 찍히게 하거나 귀환하는 날 부쳐서 그날의 소인이 찍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중계되는 인류 최대의 이벤트였기 때문에 세 명의 우주인이 사망할 경우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고, 그런 봉투가 있으면 사람들이 기념으로 갖기 위해 큰돈을 지불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판 돈으로 남은 가족들이 먹고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려 했던 것. 당시만 해도 우주로 가는 것은 무모한 시도라고 할 만큼 위험했음을 보여준다.

소련의 군 장성들이 사고로 사망한 우주비행사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유해를 바라보고 있다. 코마로프는 자신의 관뚜껑을 닫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 상황은 미국과 우주탐험 경쟁을 벌인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소련은 1961년에 인류 최초로 유인 로켓을 지구궤도에 보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비롯한 소련의 우주비행사들은 닐 암스트롱이 탄 우주선보다 훨씬 덜 발달된 기술로 우주를 향해 날아간 셈이다. 사고가 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과 소련 모두 끔찍한 사고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소련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의 사망 사고다.

코마로프는 유리 가가린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인물로, 1967년 우주로 나갔다가 지구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고장으로 인해 우주선에 설치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시속 145㎞의 속도로 지면에 충돌, 사망했다. 그런데 코마로프는 출발 전, 자신이 사고로 사망할 경우 장례식 때는 관의 뚜껑을 닫지 말고 모두가 자신의 시신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했고, 그래서 잿더미로 남은 그의 시신은 사진으로 남았다.

장례식 때 시신을 공개하는 풍습이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그런 나라에서도 공개는 시신이 온전해서 살았을 때의 모습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 때만 그렇게 한다. 따라서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공개하는 예는 없다. 자신이 사망할 경우 시신이 온전할 수 없을 걸 몰랐을 리 없는 코마로프는 왜 그런 유언을 남겼을까.

그가 탑승하게 된 1967년의 발사는 아직 우주탐사 초창기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너무나 무모한 미션이었고, 코마로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왜 소련은 발사를 강행했을까. 그해는 소련이 탄생한 지 50년을 기념하는 해였고, 정부는 소련의 기술과 국력을 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이벤트를 원했다.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은 이미 1961년에 했으니 이번에는 세계 최초로 두 개의 우주선이 지구궤도에서 만나 도킹을 한 후, 조종사가 우주선을 바꿔 타고 지구로 귀환하는 고난도의 시도를 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실무를 맡은 사람들은 충분한 준비가 되지 않아 무모한 짓임을 알았고, 코마로프 본인도 우주선의 설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수차례 지적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에 발사를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발사가 결정되었으니 코마로프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 않으면 백업 조종사로 결정된 유리 가가린이 탑승해야 했는데, 친한 친구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가게 되었으니 사고가 날 경우 “당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똑똑히 보라”는 의미로 자신의 관 뚜껑을 닫지 말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그렇게 발사된 코마로프의 우주선은 궤도에 도착하자마자 태양열 전지판이 완전히 펼쳐지지 않는 등 각종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그의 우주선과 도킹하려고 했던 두 번째 우주선은 발사를 포기하게 된다. 미션이 실패하자 코마로프가 귀환하게 되었는데, 어설픈 준비로 그 과정에서도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간신히 해결해서 내려왔지만 결국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사고의 이유는 준비와 기술의 부족이었지만, 준비와 기술의 부족이 반드시 사고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봤을 때 코마로프의 사망 사고는 결국 비전문가인 정치인들의 욕심이 전문가의 경고를 억누른 전형적인 인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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