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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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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11 22:51:00 수정 : 2021-06-11 22: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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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사랑의 가면을 쓴 폭력
광기·집착을 사랑과 혼동 말아야

젊은 시절에 미국의 남부 출신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에밀리에게 장미를’이란 단편을 읽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인데, 주인공 에밀리는 몰락한 명문가의 딸이다. 에밀리는 세월과 더불어 퇴락하는 대저택에 칩거하다가 일흔넷에 죽는다. 호기심에 찬 이웃들이 2층 침실에서 찾아낸 것은 그녀의 희끗희끗한 철회색 머리칼과 백골로 변한 한 남자의 사체다. 백골은 실종된 호머 베른의 것이었다. 도로 포장 공사장 현장감독으로 온 베른이 자신을 배신하고 떠날까 두려웠던 에밀리는 그를 살해하고 수십 년 동안 한 침대에서 잠이 들곤 했다.

이것을 ‘죽음을 넘어선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대상의 유일무이함을 인정하고, 그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이상화하는 행위다. 사랑에 빠진 에밀리는 사랑을 잃는 비극보다 스스로 살인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를 괴물로 빚은 사랑의 실체는 광기와 비틀린 집착이었다. 광기는 사랑의 속성 중 하나다. 사랑은 누군가를 미칠 만큼 좋아하는 것이다. 흔한 말로 ‘사랑에 미쳤다’라고 하지 않는가?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마음에서 점점 커져서 주체마저 삼켜버린다. 그 삼킴의 자리에 남는 것은 잡초 같이 무성해지는 사랑의 병든 환상이다.

장석주 시인

사랑의 병든 환상은 종종 현실에서 끔찍한 범죄로 이어진다.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은 2021년 3월 23일에 일어났다. 이 살인사건 피의자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20대 남자였다. 그는 두 달 전 PC방에서 우연히 만난 여성을 스토킹했다. 그는 사랑이라고 했으나 여성은 집요한 스토킹에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였을 뿐이다. 여성은 피의자에게 자신을 찾아오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여성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20대 피의자는 흉기를 들고 여성의 집으로 찾아가 세 모녀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사랑이 한 대상을 향한 열정의 과도함에서 움튼다지만 과잉 집착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이 상호 관계여야 한다는 점에서 이 20대 살인자의 사랑이란 과녁을 벗어난 비틀린 욕망일 따름이다. 사랑은 본질에서 타자와의 다정한 협업이고, 둘만의 무대에서 펼치는 정념의 정치학이다. 하지만 타인의 의지와 기대에 대한 보살핌 없이 제 감정이 시키는 대로 달려 나가는 스토킹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괴롭힘이고 사악한 폭력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열 번 찍어서 넘어가지 않는 나무는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누군가를 향한 소유 욕망에서 시작한 괴롭힘을 미화하지도 말자. 광기는 나태와 의욕상실에 대조되는 정념의 기이한 과잉 지속이다. 이것은 사랑으로 과대 포장한 격렬함이고, 자기모순과 폭력을 낳는 병적 집착이다. 광기로 무장한 괴물이 벌이는 스토킹 범죄는 한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무참하게 파괴한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의 도주이자 동시에 대상을 향한 도주라면, 광기는 그 도주가 좌절할 때 파열하듯이 솟구치는 분노의 한 양태다.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분노의 극단에 살인 행위가 있다.

사랑이란 타인을 빌려 기쁨과 의미를 빚는 행위다. 사랑은 미지를 향한 모험이고, 불투명한 미래에 제 상징 자본을 거는 위험한 투자다. 인류는 그런 모험과 투자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지구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사랑은 세월의 풍화 속에서 바래지고 모서리가 깨져나갔다. 빛이 바래고 의미가 퇴색되었다 해도 사랑은 여전히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똑똑하고 올바른 것만은 아니다. 때때로 사랑은 영혼의 얼빠짐에서 시작하는 미친 짓이다. 그것이 수수께끼 같은 위험한 광기를 품고 있음도 잊지 말자.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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