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공(滿空) 스님이 머무는 수덕사 아래에 사하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동네 나무꾼들이 음란한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만공 스님을 모시는 어린 사미승이 이 노래를 배워 부르곤 했다. 노래를 들은 만공은 혼내기는커녕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그 노래 참 좋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거라.”
어느 꽃피는 봄날에 왕가의 상궁들과 나인들이 수덕사를 찾아왔다. 이들이 만공에게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법당으로 그 사미승을 불렀다. 만공은 그에게 "일전에 부른 ‘딱따구리 노래’를 불러 보라"고 했다. 사미승은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왕궁의 여인들은 노골적인 노래가사에 낯을 붉히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때 만공은 법상에 올라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노래는 절 밑에 살고 있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얼핏 들으면 상스러운 노래인 것 같지만 노래 속에 만고의 법문이 들어 있소. 뚫려 있는 구멍, 뚫려 있는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이오. 어리석은 중생들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노예가 되어 뚫려 있는 구멍조차 뚫지 못하고 있지요. 이들이야말로 딱따구리보다 못한 멍텅구리가 아니겠소?"
음담패설을 법문으로 승화시킨 만공은 이런 법훈을 남겼다.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다 법문이요, 삼라만상의 모든 물건이 다 부처님의 진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법을 만나기가 백천만겁 어렵다고 하니 이 무슨 불가사의한 일인가?”
옛날 운문선사는 학인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라고 묻자 “간시궐(幹屎厥)”이라고 대답했다. 간시궐은 뒷간에서 똥을 눈 후에 뒤처리를 하던 나무막대기를 가리킨다. 부처가 똥막대기라니 이런 불경이 없다. 그러나 속뜻을 보면 세상의 모든 만물에 불성이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중국의 장자도 같은 말을 했다. 동곽아라는 사람이 당대의 사상가인 장자를 찾아가 물었다. “도(道)는 어디에 있습니까?” “없는 곳이 없네.” “꼭 집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있네.” “어찌 그리 낮은 곳에 있습니까?”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도 있네.” “어째서 하찮은 것에 있다고 하십니까?” “똥오줌에도 있다네.” 결국 운문 선사가 말한 똥오줌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조선의 문신 강희안은 '양화해(養花解)'에서 꽃에도 도가 있다고 썼다. 양화해는 ‘꽃을 기르는 이유를 풀어 말함’이란 뜻이다. “왜 공부는 안 하고 꽃 기르는 일 같은 데 마음을 쏟고 시간을 낭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했지요. 큰 도에 들어가는 입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들 막힌 눈이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지요. 세상 만물 어느 것 하나 지극한 이치를 담고 있지 않은 법이 없습니다. 꽃에는 꽃의 이치가 있고, 나비에는 나비의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이치가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의 이치가 있지요. 그것들은 제가끔 따로인 것 같지만 또한 모두 하나입니다. 그래서 꽃의 이치를 보다가 나비의 이치를 깨닫게 되지요. 참된 깨달음은 분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개화를 준비하는 꽃을 보며 게으른 제 자신을 반성하지요. 혹 열매 맺지 못하는 덧없는 향기는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그뿐인가요. 흘러가는 강물 앞에 서면 고여 있는 제가 자꾸만 부끄럽습니다. 공부를 안 하다니요. 참 섭섭하신 말씀입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데, 배워야 할 것이 많은데, 시간을 낭비한다니요.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이런 진리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스님이 있었다. 중국 당나라의 습득 스님이다. 그는 머리가 나빠 경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염불에도 영 소질이 없었다. 아침에 외운 염불은 저녁이면 다 까먹었다. 잘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마당 쓰는 일 뿐이었다. 스님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대웅전 앞마당을 쓸었다. 봄날이 되자 정갈한 마당에 꽃잎 몇 장이 날아와 봄의 정취를 드러냈다. 가을에는 나무에서 떨어진 단풍잎이 마당을 수놓았다. 스님은 매일 지극한 마음으로 마당을 쓸다 보니 막힌 마음이 트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스님은 3년 만에 도를 얻었다.
도는 어디에도 있다. 깨끗한 마음으로 정성을 모으는 그곳이 도가 머무는 장소이다. 그런 마음으로 삶을 대하면 어디든 극락일 것이다.
시인 이철수는 “깊은데 마음을 열고 들으면 개가 짖어도 법문이다”라고 했다. 음악이냐, 소음이냐는 결국 듣는 이의 마음에 달렸다. 마음만 열면 딱따구리 소리가 경전이고 들꽃이 부처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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