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훈련 받고 공수부대원으로 참전
혼자 적군 6명 사살… 빼앗긴 고지 점령

멕시코에서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온 이민자의 아들이 있었다. 그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스무살도 되기 전에 미 육군에 입대했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며 한국에 파병된 이 젊은이는 큰 공을 세워 미국에서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다.
◆멕시코계 이민의 아들, 한국으로 떠나다
8일 미 국방부 홈페이지를 보면 멕시코계 미국인이자 6·25 전쟁 참전용사 로돌포 페레스 에르난데스(1931∼2013)의 사연을 장문의 글로 소개했다. 에르난데스는 가난을 피해 멕시코에서 미국 캘리포니아로 옮긴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가족은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었고 장남 에르난데스는 겨우 8살 나이에 다니던 학교도 그만둔 채 부모를 도와 일을 해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10대 소년 에르난데스는 징집을 면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17세가 된 1948년 육군에 자원 입대했다. 정작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말이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발발했다. 공수 훈련을 받은 에르난데스가 배속돼 있던 제187공수연대 2대대 C중대에 한국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에르난데스의 계급은 상병이었다.
1951년 5월 31일 에르난데스의 부대는 6·25 전쟁 최대 격전지 중 한 곳인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일대에서 적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적군의 중포와 박격포, 기관총 공격이 극에 달한 반면 미군은 탄약까지 거의 다 소진하면서 결국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에르난데스는 적군 포격에 머리를 크게 다쳐 피를 많이 흘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소총이 고장날 때까지도 적군을 향해 계속 사격했다. 미군이 철수하느라 공격을 멈춘 사이 적군이 돌진해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에르난데스는 참호에서 나와 적진에 수류탄을 몇 개 던지고 돌격을 감행했다.

◆혼자 적군 6명 사살… 빼앗긴 고지 점령
수류탄을 다 쓰고 고장난 소총과 총검으로만 무장한 에르난데스는 순식간에 적군 6명을 사살했다. 그의 용감한 행동 덕분에 적군은 진격을 멈춰야 했다. 그러자 미군은 철수하는 대신 되레 반격을 가해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전투가 일단락된 뒤 미군은 적군의 시체로 둘러싸인 에르난데스를 발견했다. 당시 뉴욕타임스(NYT) 기사를 보면 전우들은 에르난데스가 전사했다고 판단해 그를 시신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에르난데스의 손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아직 살아 있음을 깨닫고 즉각 야전병원으로 후송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긴 했으나 에르난데스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었다. 그의 오른쪽 손은 영원히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에르난데스는 걷고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고, 또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글을 쓰는 법을 익혀야 했다.
미국 정부는 에르난데스를 명예훈장 수훈자로 선정했다. 고국으로 돌아간 에르난데스는 1952년 4월 12일 백악관에서 거행된 성대한 의식 후 해리 트루먼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명예훈장을 받았다. 에르난데스는 부상 후유증으로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남동생이 곁을 지키며 형을 부축하고 또 의사소통을 도왔다.
에르난데스는 수년간 군병원에서 요양한 뒤 육군을 떠났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경영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주의 보훈당국에 취업해 참전용사 등 예비역 군인들을 지원하는 일을 했다.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장애에도 말년에 골프를 배워 즐긴 에르난데스는 2013년 12월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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