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이한열 열사의 1982년 12월 26일, 31일 일기)
이한열 열사가 고교생 시절 남긴 일기와 그의 사망 관련 압수·수색 영장, 부검 결과 등 38건의 기록물이 복원됐다. 이한열 열사의 일기와 어머니가 남긴 편지 등 개인 기록물은 온라인에서는 최초 공개된다.
8일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이번에 복원된 기록은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소장 중인 이한열 열사의 유품이다. 지난해 5월 기념사업회가 국가기록원에 복원 지원을 요청하면서 올 2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복원이 이뤄졌다. 산성화와 물 얼룩에 의한 재질 변색, 오염, 찢김 등 물리적 손상으로 가독성이 떨어진 자료들을 정밀한 클리닝과 오염제거, 결실부 보강, 중성화 처리를 거쳐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이한열 열사는 1987년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졌고, 이는 그 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이한열 열사가 17세 고교 시절 겨울방학 때 쓴 일기 ‘마이 라이프’에는 “나는 우리 선조들이 당한 수모를 이를 갈며 보았다. 더욱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 “올해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바람이 컸던 해라고 본다.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와 같은 진지한 태도가 눈에 띈다. 신문에 실린 새마을 수련회 참가기와 당시 부모님께 쓴 편지에는 수련을 통한 깨달음을 담았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이 드러나는 기록도 있다.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으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글은 이한열 열사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임종을 맞이하기까지 겪은 사건과 감정을 전한다.

6월 항쟁 관련 기록 중에는 이한열 열사의 당시 주치의가 부검 과정을 수기로 남긴 것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주치의는 이한열 열사의 머릿속에서 발견된 이물질 분석을 통해 직접적 사인이 ‘최루탄 피격’이라고 썼다. 이 밖에 명동성당 시위 현장, 이한열 열사 영결식 때 이애주 선생의 살풀이 춤과 연세대 백양로에 모인 인파 등 현장 사진 등이 대거 복원됐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