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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권협정에 따라 소 제한"… 3년 만에 뒤집힌 '강제징용' 판결

입력 : 2021-06-08 06:00:00 수정 : 2021-06-08 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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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기업 16곳 상대 소송 1심 각하
피해자들은 “즉각 항소하겠다”

4월엔 위안부 2차 손배소송 각하
국민 정서와 상반된 판결 잇달아
하급심 ‘전원합의체 뒤집기’ 이례적
전문가 “대법원 판례 바뀌긴 어려워”

3년 만에 뒤집힌 판결에 정부도 난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1심 각하 판결이 나온 7일 원고 측 변호인인 강길 변호사(오른쪽)가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을 나서며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기업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징용 피해자 등 80여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각하됐다.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린 판결과 정반대 결론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는 7일 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고 입장에선 사실상 패소 판결이나 마찬가지다. 재판부는 당초 선고 기일보다 사흘 앞당겨진 이날 판결하겠다고 원고와 피고 측에 통보했다. 이 소송은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낸 여러 소송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재판부는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청구권협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언의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법원은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위와 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고 부연했다.

이날 1심 재판부의 판단은 3년 전 대법원 판결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고(故) 여운택씨 등 일제 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당시 전원합의체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우리 국민의 일본 및 그 국민에 대한 배상청구권 자체가 소멸됐다고 볼 수는 없다”며 배상청구권과 청구권협정은 별개라고 판단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정반대 판단이 하급심에서 나오면서 향후 있을 징용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일대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선 18건의 징용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다. 이날 각하 판결을 받아든 피해자 측은 즉각 항소 계획을 밝혔다.

 

외교부는 이날 강제동원 판결이 각하된 데 대해 “관련 동향을 주시하고 있다”며 말을 아꼈다. 외교부는 “앞으로도 사법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일본 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8년 반대 취지의 인용 판결이 나왔을 때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피해자들의 상처가 조속히, 최대한 치유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청구권협정 구속력 인정”… 大法 소수의견 그대로 수용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이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까지 일본 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잇달아 제동이 걸려 피해자들의 시름이 더욱 깊어지게 됐다. 특히,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재판장 김양호)가 7일 대법원 판단을 뒤집으면서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은 건 피해자는 물론 국민 대다수 정서에도 배치된다는 평가다. 재판부가 대한민국의 위신 추락이나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막기 위한 판결이란 점을 분명히한 것도 큰 논란이 예상된다. 재판부는 “헌법기관으로서 헌법과 국가 그리고 주권자인 국민을 수호하기 위해 이같이 판결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국민 정서나 여론에 구애받지 않았음을 시사했다.

◆법원 “손해배상청구권, 청구권협정 적용대상”

재판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한일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대한민국은 여전히 국제법적으로는 청구권협정에 구속된다”고 판시했다. 이어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그동안 체결된 청구권협정 등은 적어도 국제법상의 ‘묵인’에 해당해 그에 배치되는 발언이나 행위는 국제법상 금반언(이전 언행과 모순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의 원칙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다”며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하는 건 비엔나협약 제27조와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엔나협약 제27조는 ‘어느 나라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국내법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확정했을 때 나온 소수의견이 이날 판단과 같았다. 당시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일본 기업이 아닌) 대한민국이 피해자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재판부는 또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 대법원 판결이 국제중재 또는 국제재판 대상이 되는 자체만으로도 사법 신뢰에 손상을 입지만, 만약 패소하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한다”고 우려했다. 이어 “여전히 분단국 현실과 세계 4강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인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 세력의 대표 국가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된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다른 강제동원 사건에서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임재성 변호사는 “민사소송의 원고 청구를 각하하면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라 걱정을 판결문에 설명하는 재판부를 본 적이 있냐”며 “(재판부가) 피해자들의 주장에 별 관심이 없어서 기각·각하하려고 하면서도 어떻게든 법리를 고안하고 근거를 만들어보려는 위선”이라고 비판했다.

◆3월엔 “일본 정부, 소송비용 부담할 필요 없다” 결정

이 재판부는 위안부 피해자 1차 소송에서 승소한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이 패소한 일본 정부가 소송비용을 부담토록 한 것에 대해서도 지난 3월 ‘일본 정부로부터 소송비용을 강제집행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날 판결과 사실상 동일한 논리구조를 제시했다.

4월에는 같은 법원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가 이용수 할머니와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2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1차 소송의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에 승소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정반대 결론을 내린 재판부는 ‘한 주권국가가 다른 나라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을 뜻하는 ‘국가면제’(주권면제) 적용을 각하사유로 들었다.

이날 강제동원 판결과 이유는 다르지만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나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없다는 결론은 동일한 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뒤집은 건 이례적”

법조계에선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 지 3년도 안 돼 하급심에서 판결이 뒤집힌 건 이례적이란 반응이 나왔다.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흔히 있는 일도 아니다. 이번 판결이 최종 확정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원고들이 즉각 항소키로 한 만큼 일단 항소심이 1심 판결을 유지할지 알 수 없다. 항소심이 1심을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같은 ‘김명수 대법원’에서 3년 전 판결을 뒤집을지 미지수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을 지낸 양홍석 변호사(법무법인 이공)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반하는 판결이기 때문에 실제로 대법원에 올라갔을 때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고 대법원이 판례 변경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다.

 

◆“자국민 보호 않는 국가, 필요없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단체들은 7일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는 1심 판결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피해자 측도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한 강길 변호사(법률사무소 한세)는 이날 판결 직후 취재진과 만나 “오늘 판결은 기존 대법원 판례에 정반대로 배치돼 매우 부당하다”며 “(배상)청구권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심판 대상으로 적격이 있다는 것인데, 재판부가 양국 간 예민한 사안이라 다르게 판단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은 강제징용 상태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아주 부당한 상태”라며 “최소한 임금과 그에 해당하는 위자료는 배상해야 한다. 양국 관계도 그런 기초 위에서 다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등 15개 시민단체도 공동논평을 통해 “이 사건 판결은 국가 이익을 앞세워 피해자들의 권리를 불능으로 판단한 것”이라며 “재판부는 노골적으로 판결이 야기할 정치·사회적 효과 때문이라는 점을 고백했는데, 이는 사법부가 판단 근거로 삼을 영역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이어 “재판부가 비본질적·비법률적 근거를 들어 판결을 선고했다”고 목청을 높였다.

 

장덕환 대일민간청구권소송단 대표도 선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와 정부는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반발했다. 장 대표는 법원이 당사자들에게도 제대로 통지하지 않은 채 당초 10일 예정된 선고를 앞당겼다며 “사전에 연락도 예고도 없이 (선고)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다”고 항의했다.

 

이와 관련해 재판부는 “이 사건은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판결 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 설명했다.

◆韓, 대응 논리 약화… 日, 강경 일관할 듯

 

7일 법원 판결은 2018년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 취지가 받아들여지면서 그간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해온 우리 정부로서는 일관된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강경 자세로 일관할 것으로 전망된다.

 

2년이 넘는 한·일 관계 냉각기의 시작엔 2018년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이 있다. 이 판결을 빌미로 일본 정부는 한국에 수출규제를 강행했고, 우리 정부가 이를 다시 한·일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으로 맞받으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일로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 판결에서 법원이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그간의 정부 대응 논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소극적으로 임했던 정부로서는 더 어려운 상황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전직 외교관은 이날 통화에서 “‘한국은 일관적이지 않다’는 일본 우익의 일방적 주장에 여지를 주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판결과 관계없이 일본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한국에 강경 자세로 일관할 것”이라며 “2018년 판결로 인한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더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이희진·홍주형·김선영 기자 he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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