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속여 외국으로 사랑의 도피를 떠나려는 불한당 귀족은 단골 술집에서 송별회를 연다. 도피극을 준비하는 건 삼두마차 주인 발라가. 초인적인 활력을 지닌 발라가와 그의 친구들, 술집 사람들이 펼치는 16분간의 무대는 최근 만난 공연 중 단연 가장 신나고 정열적이다. 주·조연 배우는 물론 모든 앙상블이 마치 유랑극단처럼 함께 춤추고 손뼉 치며 악기를 연주하고 객석을 누빈다. 마치 카바레 쇼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이 쇼 엔터테인먼트로서 지닌 매력을 남김없이 발산한다.
‘그레이트 코멧’은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계 최신 화제작. 2012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선보인 후 2016년 브로드웨이의 명문 임페리얼극장 무대에 올랐다. 당시 현지에선 “21세기, 또 하나의 위대한 뮤지컬이 탄생했다”란 평가도 나왔을 정도라고 한다. 붉은 원형 통로 일곱 개가 겹쳐있는 무대에서 배우들은 객석을 드나들며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춘다. 뮤지컬계에선 ‘힙합’을 전면 도입한 최고 인기작 ‘해밀튼’ 이후 가장 혁신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우리나라에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공연이 1년여 미뤄지는 진통을 겪은 끝에 다행히 지난 3월 말 원작의 짜임새만 유지하고 국내 창작진이 새로 만든 초연 무대가 시작됐다.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지 뮤지컬계가 주목한 무대는 관능적이다. 관객 몰입형 극으로서 유니버설아트센터 대극장을 대수술하듯 개조해서 만든 무대는 극장 특유의 붉은색으로 꽉 채워진다. 붉은 카펫, 샹들리에로 장식된 무대에서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은 남녀 배우는 서로 유혹하고 배신한다. 불한당 귀족 아나톨이 여주인공 나타샤를 파티에서 만나 유혹하는 장면은 비교할 장면은 찾기 힘들 정도로 농밀하다. 피에르 역에는 홍광호와 케이윌, 나타샤 역에는 정은지와 이해나, 아나톨 역은 이충주, 박강현, 고은성이 맡았다.
혼자서 ‘그레이트 코멧’ 작곡·작사·대본·편곡을 맡은 원작자 데이브 말로이는 이 작품을 ‘일렉트로팝 오페라’로 소개하는데 그만큼 러시아 전통 음악과 클래식 음악이 주로 흐르나 인디 록과 전자댄스음악(EDM)도 곧잘 등장한다. 대사 없이 총 스무 세곡으로 극을 진행하는데 ‘성 스루(Sung Through)’ 뮤지컬로서 정석을 보여준다. 또 배우 대부분이 바이올린, 기타, 아코디언, 피아노 등을 직접 연주한다. 코로나 시대가 아니라면 객석에 몸을 파묻고 편하게 춤과 음악을 즐기며 마음껏 환호성을 보내는 쇼가 됐을 작품이다.


다만 이처럼 인상적인 무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는 사전 이해가 필요하다. 1200쪽이 넘는다는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는 세 가문 이야기가 중심이다. 이 작품은 그중 70쪽 분량을 떼 각색했다. 제정 러시아 귀족 사회를 배경으로 아나톨과 전장으로 떠난 약혼자 안드레이를 기다리는 나타샤는 치정 사건을 일으킨다. 그리고 안드레이의 친구이자 아나톨의 매형인 피에르의 권태로운 삶은 이 사건에 얽힌다.
559명이 등장하는 원작에서도 진짜 주인공은 귀족사회에 환멸을 느껴 전장에 나가는 안드레이, 아내 외도 등으로 삶에 회의적이었으나 깨달음을 얻는 피에르, 그리고 순진한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변모하는 나타샤다. ‘그레이트 코멧’에선 피에르와 나타샤가 각자 곡절을 겪은 끝에 한층 더 성숙해지면서 서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치명적 매력을 지닌 남성, 옴므파탈로서 아나톨 존재감이 크지만 혜성이 드디어 아름답게 등장하는 마지막 무대에서 피에르가 ‘그레이트 코멧 오브 1812’를 부르며 자신이 진짜 주인공임을 보여준다.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5월 30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