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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 권력 [정지혜의 빨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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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20 22:00:00 수정 : 2021-03-21 11: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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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근 성차별 면접 논란으로 역풍을 세게 맞은 동아제약은 여전히 “성차별로 오해를 불러일으킨 질문”이라고 할 뿐 “성차별 면접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고 있다. 사건이 처음 공론화 되었을 때도 동아제약은 피해자에게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 죄송하다”고 했을뿐 “면접 과정에서 성차별적 질문을 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공분한 여론은 불매운동을 일으켰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피해자는 “17세기 홍길동도 아닌데 동아제약은 성차별을 성차별로 부르지 못해 아주 많은 것을 잃었다”고 블로그에 썼다.

 

#2.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유서에 “모두에게 죄송하다”고 했을뿐 성추행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암묵적인 인정과 사죄를 하려던 의도가 포함됐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모든 부담을 떠안도록 만들었다. 이후 법원과 권익위가 ‘성추행이 맞다’고 했음에도 여당은 원론적 사과만 거듭했을뿐 명확하게 이를 시인하고 책임지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3. 박 전 시장 사건 피해자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직 서울시장 비서실 직원은 지난 18일 항소심 공판에서 1심과 달리 ‘혐의를 모두 인정한다’고 했다. 그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성폭행 사실을 이제야 인정하고, 합의 의사를 밝혔다. 피해자 변호인은 “1심 재판부가 공판을 통해 확인된 내용을 토대로 꼼꼼히 판결문을 작성하자 승복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공자는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으면, 이야말로 가장 큰 허물이다”라고 했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다. 이를 인정하고 고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을 저지르기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스스로의 품격이 더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고도 이를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이들을 많이 본다. 다른 분야보다 성차별·성폭력 이슈에서 이는 두드러진다. 성별 권력이 굳건히 작동하는 사회에서 가해자들은 웬만해선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도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내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강변한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피해자가 당하는 강도의 ‘조직적 괴롭힘’을 경험하거나, 일상이 위협당하지는 않는다. 

 

같은 시각 피해자들은 어떨까. ‘증거가 남기 힘들기 때문에’ 저질러지는 성범죄의 특성은 무시한 채 피해 사실을 입증할 요구를 과도하게 받는다. 갖은 음모론과 모욕, 협박, 안전의 위협을 받으며 홀로 고립된다. 그를 돕는 활동가, 법조인 등 연대자들에게마저 ‘2차 가해’가 손쉽게 저질러진다.

 

가해자의 권력은 그가 이를 남용해 잘못을 저지르도록 하고, 그 후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아도 되게 만든다. 피해자의 권력 없음은 가해자를 제지할 수 없게 하고, 그 후에도 힘든 싸움을 이어가게 만든다. 강약약강의 사회는 권력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정치적 이해관계나 세력 싸움 등이 끼어들 때에나 이권 다툼을 위해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모양새를 취한다.

 

가해자가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마치 불문율이라도 되는 양 여겨지는 사회. 스스로 목숨을 저버릴지언정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가해자의 모습은 이러한 암묵적 규칙이 작동함을 보여준다.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지켜야 했던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주류 남성 사회의 이 같은 정서가 유지되는 한 가해자들에게 ‘성차별·성폭력 사실 인정’은 무엇보다 큰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허물이 있음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단계에서 이를 개선하는 일은 더욱 요원하다.

 

마침내 성평등이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 가해 남성이 성차별·성폭력 사실을 부인할 경우 더 큰 역풍을 맞을 것이다. 끝내 인정하지 않다가 일을 키워 최후의 순간에야 마지못해 시인하는 그런 일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가 잘못을 부인하며 버텨봤자 득 될 것 하나 없어 차라리 깔끔하게 인정하고 반성하는 쪽을 택하는가.’ 이것이야말로 성평등이 도래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지표가 아닐까. 아직은 가해자들에게 믿는 구석이 존재하는 사회 같아 보여 안타깝다.

 

그러나 균열은 생기고 있다. 잘못을 인정하는 가해자의 용기가 아닌 잘못을 고발하고 싸우는 피해자의 용기 덕분이라는 점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피해자가 남긴 문장 하나가 계속 맴돈다. “우리는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정지혜 기자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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