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구이언(一口二言)은 이부지자(二父之子).” 그런 말을 겁 없이 쓰던 때가 있었다. “남아일언은 중천금(重千金)”도 마찬가지다. 말은 그만큼 신중하게 해야 하고, 자기가 한 말에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작동한 까닭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무를 넘어 강박적으로 말을 지키려 들 때이며, 더 큰 문제는 어쩌지 못해, 어쩌다 보니 두 말을 하게 되는 경우이다.
중국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애첩이 있었다. 그는 평소 아들 위과(魏顆)에게 나중에 자신이 죽게 되면 꼭 개가(改嫁)시키라고 일렀다. 그런데 위무자의 병세가 깊어지자 말이 바뀌었다. 따라 죽도록 하게 하라는 것이다. 나중에 위무자가 죽자 위과는 아버지의 애첩을 개가시켰다.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어지러운 법, 아버지의 정신이 맑을 때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위과가 왕명을 받들어 싸우게 되었는데, 어떤 노인이 나타나 풀을 묶어 매 적장(敵將)이 탄 말이 고꾸라지게 했다. 위과는 그 덕분에 적장을 사로잡아 승리할 수 있었는데, 그날 밤 꿈에 웬 노인이 나타났다. 자신이 바로 그 애첩의 아버지로서 위과의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했다.(좌전·左傳)
많이들 알고 있는 ‘결초보은(結草報恩)’ 고사성어가 나온 내력이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말이 나왔을 때, 대체 어떤 말을 따라야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다른 말이라면 몰라도 유언이라면 죽기 직전의 말을 따라야 할 듯싶지만, 지혜로운 위과는 반대로 했다. 세속의 윤리나 이해득실을 떠나 아버지의 본심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해냈던 것이다. 그것으로 아버지를 욕되게 안 하는 효도를 했으며, 불쌍한 서모를 순장(殉葬)에서 구했고, 자신의 목숨을 전장에서 살렸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상한 효자들이 제법 많다. 혼수상태에서의 유언이라도 제게 조금이라도 잇속이 있는 내용이다 싶으면 덥석 취하기 일쑤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었을 뿐이라고 강변하곤 한다. 아버지든 직장 상사든, 윗사람을 잘 모시려면 윗사람을 욕보여서는 안 된다. 윗사람의 지시대로만 따르는 것으로 아랫사람 책임이 모면된다면 아랫사람의 존재 이유는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이 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달콤하면서도 위험한 유혹은 이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제 뜻이 아니라 윗분의 뜻입니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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