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구미의 빈집에서 숨진채 발견된 3살 여아에 이어 외할머니로 알려졌다가 친모로 밝혀진 석모(48)씨의 얼굴도 방송사에 의해 공개됐다. 경찰은 석씨와, 이사가면서 3살 아이를 버려둔채 방치해 숨지게 한 석씨 딸 김모(22)씨의 신원을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으나, 방송사가 피의자 얼굴을 공개한 것이다.
피해자이나 부모나 법적 대리인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3세 아이의 생전 모습 공개에 대해선 “우리라도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의견과 “피해아동의 외모를 부각해 본질을 흐린다”는 비판이 엇갈린다.
그러나 가해 모녀에 대해서는 경찰이 구체적으로 신원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전문가들도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핵심 인물이 굳게 입을 다문 상황에서는 주변인물이나 목격자 제보를 위해서라도 가해자 신원을 공개해야 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을 재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의자 신원 공개 요구에 경찰 난색, 결국 방송사가 공개
SBS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는 지난 15일 석씨의 얼굴 사진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개하며 ‘아동 학대로 사망한 구미 3세 여아의 친모로 확인된 석씨(1973년생)를 알고 계신 분들의 연락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공개된 사진에서 석씨는 밝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한 상태로 얼굴이 희미하게 드러나 있다.
앞서 12일에는 다른 방송사 프로그램이 유튜브 채널에 ‘구미 3세 여아 사건 제보를 기다립니다’라는 제목의 영상과 함께 아이의 생전 모습을 공개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이 ‘이렇게 예쁜 아이를’ 등의 제목으로 뉴스를 보도하는 등 피해아동 외모를 부각하면서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피해아동을 외모로 평가하는 듯한 인식을 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제보를 통해 수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사망한 아이보다 친모의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만큼 친모로 밝혀진 석씨와 아이를 방치한 채 이사를 가버린 석씨의 딸 김씨의 이름과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사건을 수사중인 경북경찰청은 “현재 신상정보 공개 심의위원회 개최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자 방송사가 제보를 기다린다며 친모인 석씨 사진을 흐릿하게 처리해 공개한 것이다.
◆까다로운 가해자 신원 공개 요건
국민적 공분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이들 모녀의 신상을 공개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는 뭘까.
경찰은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의자 인권 보호를 위해 신상 공개를 가급적 자제하지만, 필요에 따라 제한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피의자의 신상 공개 여부는 경찰과 변호사 등 내·외부 위원으로 구성된 경찰청 산하 신상정보 공개 심의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심위위는 2010년 4월 개정된 ‘특정강력범죄 처벌에 대한 특례법’을 근거로 △범행 수단이 잔인하고 피해가 중대하며 △피의자가 그 죄를 범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범죄 예방 등 공공 이익을 위해 필요하면 피의자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수 있다.
피의자의 인권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하고 이를 남용해선 안 된다는 단서 조항도 달렸다.
문제는 해당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승재현 연구위원은 “향후 무죄로 뒤집히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범죄 증거가 있어야 피의자 신원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너무 엄격한 요건”이라며 “범행 수법이 흉악하다는 판단과 국민의 알권리 또는 공공의 이익에 필요하다는 기준 역시 추상적”이라고 지적했다.
경찰은 현재로선 구미 여아 사망사건 가해자들이 이 세가지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DNA검사를 통해 사망한 아이가 석씨의 친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딸 김씨의 아이와 바꿔치기한 정황만 있을 뿐 명확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또 딸 김씨는 아이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해 살인 혐의를 받고 있지만 ‘범행수단이 잔인하다’는 기준 자체가 모호해 선뜻 적용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아동을 유기, 방치한 상태에서 발생한 아동학대 사건은 흉악한 폭력 범죄로 볼수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피의자 공개 확률이 높지 않았다”고 말했다.
◆피의자 신원 공개 요건 명확하게 재정비해야
이처럼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흉악범이나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범죄자의 얼굴 등 신원이 공개되는 사례는 드물었다. 따라서 원활한 사건 수사와 재발 방지를 위해 피의자 신원 공개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승 연구위원은 “사건 수사에 도움이 될 수 있고, 관련 사건을 발본색원해 재발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피의자 신원을 공개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그러면 사건 증인이나 제보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고, 추가 또는 유사 범죄 가능성 차단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해 국민의 분노를 풀어주자는 사적 보복 수준의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곽 교수는 “주로 국민적 공분이나 관심있는 사건의 피의자 신원 공개 요구가 빗발치는데 그 기준 역시 객관적인가. 국민 관심도 주관적인 것이 많다”면서 “주로 살인이나 성폭행 사건이 많았지만, ‘n번방 사건’ 등도 처음에는 공개하지 않다가 논란이 확산해서 공개했다. 객관적인 기준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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