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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상호 교감… 찰나의 순간 화폭에 담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0-12-19 10:00:00 수정 : 2020-12-18 21: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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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자기만의 예술 언어 가진 임동식
팝아트·개념미술 등 유행 좇지 않고
야외 자연물 이용한 퍼포먼스 선봬
獨 유학 후 농촌에 들어가 터 잡아
꽃 핀 마을 풍경 등 섬세하게 작업
사진과 영상으로 남겼던 퍼포먼스
그림으로 재창작… 추억을 가감·증폭
떠오르는 시상을 반복해 가다듬듯
구조·표현 방식 등 실험하며 개작
1981년 ‘일어나’ 퍼포먼스의 사진들을 하나의 화폭에 옮겼다. 기록인 동시에 새로운 작업으로 해석의 여지를 확대한다. ‘일어나’(2019∼2020).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시간을 반추하는 일

어느새 한 해의 끝이 눈앞에 와있다. 예년보다 늦은 추위와 첫눈에 실감이 나지 않지만 말이다. 전염병과 장마로 지난했던 한해도 이렇게 마무리지어진다. 이 시기가 되니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사진첩과 일기장을 뒤적이며 보이는 장면과 문장으로 그때를 반추해 본다. 이렇게 한참을 보내자 임동식의 작품이 떠오른다.

임동식(1945)은 자연미술이라는 자기만의 예술언어를 가진 작가다. 그는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거쳐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 자유미술학과를 졸업했다. 대전시립미술관, 아르코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 외에도 대구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여름과 가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85년에는 독일 알토나 미술상을 받은 바 있다.

#임동식의 순환하고 같이하는 미술

임동식이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는 서양 현대미술이 물밀 듯 들어오는 시기였다. 팝아트, 옵아트, 개념미술 등 다양한 사조가 전해졌다. 그는 이 흐름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보다 자생적인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생적인 미술을 찾기 위해 본래의 나와 그 시작을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 개울에서 물장구치던 자연과의 교감이 있었다.

임동식은 대학 졸업 이후 중고등학교에 다닌 공주로 내려갔다. 그간의 삶에서 벗어나 원점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는 공주에서 자연을 주제 또는 매체로 다루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를 자연미술이라고 부르며 동료들과 관련 모임과 행사를 마련하는 데도 힘썼다. 1980년 금강에서 ‘금강현대미술제’를 개최했고, 1981년 여름에는 ‘야투(野投)-야외현장미술연구회’를 결성했다. 야투는 자연에 나를 던진다는 의미다.

꽃이 핀 원골 마을을 그린 작품. 떨어지는 빗방울까지 섬세하게 그려냈다. 자연 구석구석을 세심히 살피는 작가의 성정이 느껴진다. ‘원골에 심은 꽃을 그리다-3’(2019∼2020) 홍철기 작가가 촬영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임동식은 야외 현장에서 자연물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자주 선보였다. 몸에서 나는 수염과 땅에서 나는 풀잎을 끈으로 연결해 자연과 일체감을 느끼거나, 고개 숙인 꽃들의 인사에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이는 퍼포먼스 등이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작업으로 야외 현장과 자연물이 가진 예술 가능성을 타진했다. 독일 함부르크에 유학하러 가서도 이러한 노력은 계속 이어졌다.

그는 긴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왔고 공주에 다시 갔다. 이번엔 전보다 깊숙이 위치한 농촌 마을, 원골에 찾아 들어가 자리 잡았다. 감나무 근처에 맨손으로 살 집을 짓고 꽃을 심고 텃밭을 가꾸었다. 산토끼, 강아지를 키우며 몸으로 자연과 부대끼는 경험도 했다. 동네에서 사귄 친구의 권유로 풍경을 다루는 회화작업도 시작했다. 고개 숙여 인사하던 꽃들을 화폭에 옮기는 일이었다.

원골 마을에 살며 그는 농사짓는 행위와 자연예술 행위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자연과 교감하는 삶의 방식 중 하나였다. 작가는 이때부터 ‘예즉농(藝則農), 농즉예(農則藝)’라는 미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농경이야말로 자연 생명 예술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현대인들이 겪는 환경, 정신적 문제의 해결책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순환하며 사는 것. 더불어 살아가는 마을단위의 관계 맺기 등이다.

#‘일어나’(1981) 그리고 ‘일어나’(2019~2020)

임동식의 자연미술은 크게 밖과 안의 활동으로 나뉜다. 그는 자연이라는 밖에서 퍼포먼스를 행한다. 그 작업을 사진, 영상 등의 기록매체를 통해 안으로 옮긴다. 장면과 단상은 이미지 또는 글로 전시되거나 작품집에 담긴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개진하기 위한 참고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밖과 안으로 나누어지지만 서로 이어져 순환하는 구조를 가졌다.

작가는 언젠가 과거에 남기지 못한 동료의 퍼포먼스를 기록하는 시도를 했다. 자료를 찾고 기억을 더듬어 ‘예술과 마을’에 실었다. 이러한 시도는 본인의 작업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과거 작업을 소환하여 회화의 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순환의 대상은 안과 밖이라는 장소 외에도 과거와 지금이라는 시간으로 확장한다.

 

옅은 안개가 낀 것 같은 강이 있다. 그 안개 사이에 낮은 산자락이 이어지는 모양이 보인다. 고요함이 전해오는 풍경을 배경으로 그 앞에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의 손에는 키를 훌쩍 넘는 나뭇가지가 있다. 일부는 강에 잠겨 있고 나머지는 하늘을 향한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꼭 쥐고 몸을 반쯤 숙인 상태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의지하고 힘을 주어 일어나려는 듯 보인다. 유채물감으로 그렸지만 담백하게 붓질해낸 화면이 인상적이다. 물감의 붓질과 겹침은 공기층마저 묘사하는 듯 보인다. 단순하게 그렸지만, 사진에서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1981년 ‘일어나’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첫 모임에서 선보인 모습이다. ‘일어나’(1981).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 그림 ‘일어나’(2019~2020)는 작가의 퍼포먼스 ‘일어나’(1981)를 담은 작품이다. 작가는 1981년 여름 공주 금강에서 ‘야투-야외현장미술연구회’ 첫 모임을 했다. 이 자리에서 ‘일어나’, ‘올라가’라는 두 가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임동식만의 미술세계가 시작한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작품에는 그날을 기록한 두 장의 사진 속 인물이 한 화면에 그려졌다. 다른 점은 인물이 두 장의 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화면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다른 순간의 한 인물은 대각선 방향으로 조금 떨어져 서서 포즈를 취한다.

이렇게 그는 자연과 상호 교감하는 미묘한 순간을 표현해낸다. 그것을 가장 자연적인 형태로 묘사하려 애쓴다. 긴 세월에 걸쳐 구조, 안료, 표현 방식 등을 실험하며 개작하는 이유다. 이는 고도의 함축적이고 축약된 표현을 표면으로 끌어낸다. 떠오르는 시상에 잠겨 시를 반복해 가다듬는 과정과 닮았다. 그의 작품에서 시의 미학적 정서가 느껴지는 이유다.

결국, 그의 최근 작업은 아카이브인 동시에 새로운 창작물이다. 과거 퍼포먼스의 재연을 넘어서며 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작품이 가진 해석의 가능성을 확장해 눈앞에 펼쳐낸다. 그 시절의 기억과 감정의 흔적은 다시 작업하며 가감하거나 증폭한다. 사진과 같은 기록 기술 매체가 보여주는 것과 다른 결과물을 가져온다. 오롯이 사람의 손이 생각과 감정을 담아 만들어낼 수 있는 장면이다.

#기록에서 다시 태어나는 지금과 내일

언젠가 이런 문장을 썼다. “밀란 쿤데라는 지옥은 비극이 아니며, 어떠한 비극적 흔적도 없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말했다. 비극이 일어나도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이 되지 않는다. 흔적 속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로잡고, 또 어루만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임동식의 최근 작업을 보며 밀란 쿤데라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기록을 남기는 것만큼 그것을 다시 보는 일은 중요하다.

코로나19가 점철한 것 같은 2020년. 타임지는 12월 어느 날의 표지에 “2020 최악의 해”라고 적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더 열심히 기록하고 반추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같은 문제를 다시 마주해도 나은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노력이 새로운 모습과 해석의 밑바탕이 되리라고 믿는다. 임동식의 작품에서처럼 장소와 시간, 그리고 자연은 순환한다.

김한들 큐레이터·국민대학교 미술관, 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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