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인생의 절반은 사업가로 승승장구… 나머지 삶은 봉사로 “好好” [나의 삶 나의 길]

, 나의 삶 나의 길

입력 : 2020-12-05 06:00:00 수정 : 2020-12-04 19:14:04

인쇄 메일 url 공유 - +

국제라이온스협회 최중열 국제회장
패기 만만한 상사맨
사회생활 1년6개월 만에 퇴직
신발무역회사 창업해 탄탄대로
탁월한 영어실력 바이어 신뢰

세계로 신발을 수출하다
불량 없는 최고품질 수출 위해
제조업체에 돈과 사람 안 아껴
철저한 관리로 회사 3개로 늘어

라이온스와의 만남
인건비 상승하며 공장 해외 이주
과감하게 사업 접고 봉사 시작
추진력 인정받아 국제회장까지

봉사하는 삶이란
은퇴 없는 평생 직업인 동시에
돈으론 얻을 수 없는 행복감
‘타인을 위한 삶’이 새 좌우명
“‘우리는 봉사한다’. 제 봉사 인생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최중열(76)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은 봉사를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라이온스 회원으로 활동하며 봉사를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세계 약 140만명의 회원을 이끌고 있는 그를 지난달 25일 부산 라이온스회관에서 만났다. 봉사를 통해 남을 돕는 삶을 보상 받은 듯 얼굴에는 젊은이 처럼 생기가 돌았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경남 거창에서 1남3녀중 막내로 태어난 최 회장은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음대 진학을 위해 2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지만 군대 영장때문에 농대 원예과에 진학했다.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틈틈이 시간을 내 서투른 실력이지만 피아노를 연주한다. 건반을 칠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하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학군장교후보생(ROTC) 7기로 임관했다. 전체 5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인해 꽃보직으로 불리는 곳을 골라서 갈 수 있었지만 그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아내의 대학이 있는 부산을 자원했다. 통역장교였던 그는 미 하야리아 부대 옆에 위치한 총포타이어재생창으로 배치됐다. 통역을 위해서는 총포에 들어가는 부속을 하나하나 외워야했다. 밤을 새워서라도 완벽하게 준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첫 브리핑을 받은 미 장군은 ‘퍼펙트’하다며 격려했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미 고문단장의 전속 부관으로 배치돼 당초 복무기간 보다 2년을 연장해 총 4년 3개월의 군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

친구들보다 2년 늦게 대학에 입학하고 군대생활을 2년 연장했기때문에 사회생활이 4년이나 뒤쳐졌다고 생각한 그는 조바심을 뒤로하고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국내 경제는 섬유와 신발 등 노동집약산업의 수출이 한창이었다. 국내 수출 1위 업체는 수출 실적 800만불의 태화고무였다. 당연히 인재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능통한 영어실력을 갖고 있는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른 것은 당연했다. 바이어가 몰려드는 데 영어로 상담을 할 사람이 귀했다. 패기만만한 그는 회사에 들어가면 1년 만에 계장으로 승진하고, 2년 만에 과장, 3년 만에 부장, 4년째는 퇴사해 개인 사업을 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 고무회사에 입사했지만 일본식 연공서열을 중요시하는 문화때문에 과장 승진에 10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1년 만에 그만뒀다. 신입사원 시절 나이키로부터 운동화 1만1500컬레를 주문받는 실적을 거둘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영어실력 때문에 동기들보다 1만원이 더 많은 3만5000원의 월급을 받고 있었지만 미련 없이 퇴사했다.

회사를 그만 둔 사실이 알려지자 경쟁업체에서 과장자리를 주겠다거나 계장으로 입사하면 6개월 뒤 과장 승진을 보장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사 의향을 물었다. 과장 승진을 약속한 회사에 들어가 근무하던 중 그의 성실한 인간성에 신뢰를 갖고 있는 한 미국 바이어가 창업을 제의해 그 길로 사표를 내고 무역회사를 차렸다. 그 바이어는 “당신을 통해 신발을 주문하고 신용장을 보낼테니 걱정말고 회사를 창업하라”고 권했다.

1975년 저축한 돈에다 은행 대출을 받아 사무실을 임대하고 전화기와 사무집기 등을 설치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월급 3만5000원을 받으면서 사회를 시작할 때는 100만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창업한 첫 달 그의 소망이 이뤄졌다. 1개월만에 1백40만원을 벌었다. 생활비 등으로 지출하고도 통장에 1백20만원이 남아있었다. 통장을 양복 안 주머니에 갖고 다니며 꺼내 봤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볼 정도였다. 사업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어음과 커미션을 받지 않았다. 창업 당시 부산은 시민의 45%가 신발산업에 종사할 정도였으며 부산에서 만든 운동화가 전 세계 운동화의 90%를 차지할 정도로 활황이었다. 세계인이 신는 운동화는 거의 부산에서 만들었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사상공단에는 한 집 건너 마다 신발 자재를 만드는 공장으로 넘쳤다.

그는 ‘세계인이 신는 신발을 내 손으로 수출한다’는 각오로 밤 낮 없이 뛰어다녔다. 최고 제품만을 고집하는 회사 운영방침은 바이어들로부터 ‘최중열 사장한테 맡기면 불량률이 없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바이어들은 하나같이 그와 일하고 싶어했다. 그는 불량률을 줄이고 최고 품질을 수출하기위해 신발 제조업체에 10%를 더 지불하는 조건으로 계약했다. 대신 품질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공장 생산라인에 직원을 배치해 전수검사를 실시했다. 10% 비싼 가격에 운동화를 주문하더라도 불량률이 줄어 결과적으로 이익이었다.

외국 바이어에게는 계약조건으로 ‘선적이 끝난 제품에서 불량제품이 나오면 3%는 책임을 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불량품 자체가 드물었지만 하자가 있더라도 반품으로 인한 시간과 경제적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매출은 자고나면 늘어났으며 회사 평판 또한 치솟았다. 주문이 급증해 신발중개무역회사를 3개씩 운영할 정도로 업계에서 인정 받았다. 그가 월급쟁이 시절 알고 지내던 외국계 회사 바이어가 다 그를 찾아왔다. 클락스,허시파피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외국 신발업체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그는 바이어로부터 주문받아 수출만 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한 바이어와는 신설 회사를 만든 뒤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가죽운동화를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농구 등 운동을 좋아하는 스포츠인들이 발목을 움직일 때 불편을 줄일 수 있도록 끈을 두개로 나눠 위와 아래에서 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100만컬레 이상을 수출했다. 또 청바지 재질로 운동화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자 섬유회사에서 새로운 원재료를 개발해 선적했다. 그는 일년에 5500만불을 수출하는 실적을 거둬 무역회사로서는 드물게 정부로부터 수출유공자상을 받았다. 당시 회사이름은 코알라상사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부터 인건비가 상승하고 노조가 생기면서 제품 조달이 쉽지 않았다. 인건비가 생산비의 15%를 넘어가자 노동집약 산업의 메카였던 부산의 매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신발제조업체들은 임금이 싼 베트남과 중국으로 생산공장을 옮겼다. 거래 업체도 중국으로 이전해 자주 현지에 출장을 갔지만 왠지 중국에만 가면 음식과 문화가 맞지 않아 불편했다. 숙고 끝에 1994년 회사를 정리했다. 중국에서 생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업에 손을 떼겠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고생해서 사업을 일정 궤도에 올려놓았고 가만히 있어도 갈쿠리로 돈을 긁을 텐데 왜 그만둘려고 하느냐”며 만류했지만 미련없이 사업을 접었다.

최중열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은 “140만명의 회원을 대표하는 글로벌 봉사단체의 수장으로서 세계각국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한국인의 책임감을 느낀다”며 “시카고에 있는 국제라이온스협회 본부에 태극기가 걸린 모습을 보면서 높아진 우리나라의 위상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사업을 그만둔 그는 1977년 거래처 사장의 권유로 가입한 라이온스클럽 활동에 앞장섰다. 사업이 번창해 주변에서 성공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편에서는 허전함이 밀려왔다.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라이온스 활동에 더 빠져들었다. 라이온스에서도 사업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이었다. 추진력을 인정받아 1993년 부산지구 총재와 1994년 한국연합회 초대 총재를 맡았다.

그의 라이온스 발자취는 굵직하다. 2000년 국제라이온스 동남아대회와 2012년 국제라이온스 세계대회를 부산으로 유치해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2012년 행사에는 세계 11개국에서 5만5308명이 참석해 한국기록원으로부터 ‘한국 최대 컨벤션행사’로 인증을 받았다.

“아프리카와 헝가리 등 회원국을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투표 참여자 37명 가운데 34표를 얻어 세계행사를 유치하는 쾌거를 거뒀습니다.”

단일행사에 5만여명의 회원이 참석한 것은 라이온스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었다. 추진력과 포용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적극적인 활동을 눈여겨 본 국제라이온스협회가 그를 임기 2년의 국제이사에 이어 7년 연속 지명이사로 임명했다.

협회 내 가버너스 스쿨 교수라는 중책을 맡아 10년 동안 세계각국과 전국을 다니며 회원들의 자질향상에 기여했다. 2016년 국제3부회장을 시작으로 국제2·1부회장을 거쳐 지난해 7월 회원 140만여명의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에 선출됐다. 104년 역사를 가진 국제라이온스협회의 한국인 회장은 2003년 이태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이후 두번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세계대회를 개최하지 못하면서 국제회장직을 1년 더 수행해야 한다. 사정이야 어떻든 라이온스 역사상 국제회장을 연임한 것은 그가 유일하다. 내년 6월까지 국제회장을 지낸 후에는 직전 회장 자격으로 3억달러 규모의 예산을 총괄하는 재단이사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2000년 열린 동남아대회때 문화교류를 통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행사로 치러냈다. 참가한 각 나라 76개 지구에 고유한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 눈길을 사로 잡았다. 라이온스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는 행사를 기획하고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보람으로 느낀다.

“라이온스는 국가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하는 부분에서 봉사활동을 펴고 있습니다. 국내 회원들은 일년에 400∼500억원이라는 막대한 회비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봉사의식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 입니다.”

그는 라이온스 창시자인 맬빈 존스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남을 위해 뭔가를 하기 전에는 성공했다고 얘기할 수 없다.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으면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해라.’ 지금 그의 좌우명이다.

 

부산=글·사진 박연직 사회2부장 repo21@segye.com

 

최 회장은… ●1944년 경남 거창 출생 ●동아대 원예학과 ●ROTC 7기 임관 ●1975년 코알라상사 창업 ●1977년 부산제일라이온스클럽 가입 ●1993년 라이온스클럽 부산지구 총재 ●1994년 라이온스클럽 한국연합회 초대 총재 ●2000년 국제라이온스 동남아대회 부산 유치 ●2012년 국제라이온스 세계대회 부산 유치 ●2016∼2018년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3·2·1부회장 역임 ●2019년∼현재 국제라이온스협회 국제회장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최지우 '완벽한 미모'
  • 최지우 '완벽한 미모'
  • 전지현 '눈부신 등장'
  • 츄 '상큼 하트'
  • 강지영 '우아한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