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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란 핑계로 편지 한 통 띄웁니다 [S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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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0-17 13:00:00 수정 : 2020-10-17 10: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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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의 재발견
톡 묻고 툭 답하는 디지털 시대
쑥스러움도 ‘꾹꾹’ 사랑도 ‘꾹꾹’
삐뚤빼뚤 손글씨에 위로받다

‘귀하는 언제 손편지를 써보셨습니까?’

이 질문에 선뜻 대답이 나오는 이, 얼마나 있으랴. 아마 대부분이 이럴 것이다.

“편지? 음, 언제였더라. 분명 써본 기억은 있는 것 같은데… 보자보자, 1년, 2년, 3년….” 갸우뚱해진 고개로 손가락까지 접어가며 거슬러 봐도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 편지는 무슨….’ 넉넉 잡아 10초면 ‘잘 지내냐’ 물을 수 있는 시대 아니던가. 편지지, 편지봉투, 볼펜, 우표, 딱풀, 주소, 우편번호…. 준비할 건 또 얼마나 많은지. 거기다 꽁꽁 숨겨뒀던 악필까지 공개해야 한다고? 그 터무니없는 ‘가성비’에 헛웃음만 나온다.

그런데도 기어코 편지를 쓰겠다는, 그것도 펜으로 꾹꾹 눌러 쓰는 ‘미련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주부 이소란(44)씨는 얼마 전 가족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도착 일자는 2021년 10월, 꼭 1년 뒤다. 서울 왕십리역 광장 한쪽에 설치된 ‘느린우체통’을 통해 부쳤다.

“편지 쓴다는 게 말이 쉽지, 사실 많이 번거롭잖아요. 그래서 편지를 보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썼을지 한 번쯤 머리로 상상해 보게 되는, 그런 게 참 좋은 것 같아요. 내년의 가족에게 제 나름의 선물을 보낸 셈이죠.”

물론 받는 이의 감동은 주는 이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새내기 교사 박수민(25·여)씨는 교육실습생 때 받은 편지는 보기만 해도 감정이 벅차오른다고 한다. “당시 조금 힘든 일이 있었는데, 그게 티가 났었나 봐요. 아이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편지와 선물을 받았는데 어찌나 감동이던지. 읽으면서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 편지, 지금도 제 방 벽에 붙어 있어요.”

 

가을, 그러니까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 친구를 떠올리며 ‘써야지 써야지’ 마음먹어도 막상 편지지 앞에 서면 영 겸연쩍어져 없던 일이 되고 마는, 바로 그 계절이 됐다.

 

느리고 불편하기만 한 편지는 왜 쓰는 것이며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일까. 디지털 시대에도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손으로 쓴 편지의 가치를 들어봤다.

 

◆사라져버린 손편지

 

일단 손편지의 ‘실종’은 기분 탓만은 아닌 듯하다. 이는 통계로도 확연히 드러난다.

 

16일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보통의 편지가 포함되는 일반통상 우편물은 1996년 통계 집계 이래 지난해 처음으로 30억통을 밑돈 것으로 나타났다. 1996년 35억7726만통이었던 일반통상 우편물은 2002년 52억2225만통으로 정점을 찍은 뒤 이듬해부터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전국의 우체통 숫자도 덩달아 줄어들었는데, 1996년 4만3549개였던 우체통은 지난해 1만1793개로 무려 73%나 줄었다. 편지를 보낼 물리적인 통로 자체가 없어진 셈이다.

 

언뜻 1990년대 후반 널리 퍼진 이메일이 주된 이유일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보다는 스마트폰 보급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2000년의 42억5784만통은 1999년 35억8881만통에 비해 20%가량 늘어난 수치이며 이후 2012년까지 단 한 번도 40억통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카카오톡 PC버전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2013년 처음 40억통(39억2049만통)이 무너진 뒤 지난해에 이르러 28억126만통으로 급감했다.

 

이제는 ‘이등병의 편지’도 옛말이 됐다. 훈련소에선 인터넷 편지를, 자대에서는 스마트폰 메신저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명절이면 꼬박꼬박 주고받던 연하장이나 안부 편지 역시 디지털 메시지로 대체된 지 오래다. 보내는 이나 받는 이나 굳이 불편함을 감수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지금도 종종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는 직장인 유모(38)씨는 “으레 편지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상황 자체가 많이 없어졌다”며 “이제는 손편지가 더 유난스럽고 낯설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손편지에 담긴 어떤 ‘온기’

 

“물체로서의 편지는 만지고 보는 것, 접는 것, 펼치는 것, 구기고 펴는 것, 겉봉투와 재킷 주머니에 넣는 것, 책갈피로 쓰는 것, 둥그런 커피 자국이 생긴 것, 쥐들이 쏠은 것, 구두 상자에 넣고 까맣게 잊어버리는 것이다.”(마이클 버드, <예술가의 편지>)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은 멸종위기에 처한 편지가 가진 마지막 경쟁력이다. 언제나 반듯한 폰트와 달리 삐뚤빼뚤 손글씨에는 인간의 어떤 ‘온기’가 담기기 마련이다.

 

2017년부터 ‘온기우편함’을 통해 수신자 없는 편지에 답장을 써온 주부 이승아(52)씨는 편지 쓰기를 “진심을 만나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SNS나 메신저는 메시지라기보다는 ‘반응’에 가까워요. 툭 묻고 툭 답하는 것이죠. 막상 편지를 쓰려 하면 쓰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그만큼 진심을 담아본 경험이 없는 거예요.”

 

그는 “저만 모기에 너무 많이 물려요” “엄마는 왜 맨날 소리 지르나요?” 같은 엉뚱한 편지에 웃음 지을 때도 있지만 가끔은 가슴 뭉클해질 때도 있다고 했다. “엄마 안녕”으로 시작하던 얼마 전 받은 편지가 그랬다. “무척 조심스럽더라고요. 누군가의 딸이자 어머니로서 느낀 바를 최대한 담아 답장을 썼어요.”

 

이씨가 참여하고 있는 ‘온기우편함’은 단어 그대로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난 4년 동안 아내와 사별한 독거노인, 취업을 앞둔 대학생, 정리해고가 두려운 직장인 등이 보내온 8123통의 편지에 자원봉사자 500여명이 일일이 답장을 보냈다.

 

온기우편함을 처음 고안한 조현식(30)씨는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고 모티프를 얻었다”며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SNS상 모습과 달리 현대인들은 누구나 고민을 안고 있다. 손편지에 담긴 힘이 그들에게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정의한 편지의 의미는 “위로”였다.

 

◆“편지는 ‘기브 앤드 기브’”

 

너도나도 ‘소통’을 말하는 SNS의 시대에 왜 손편지가 더 도드라져 보이는 걸까. 어쩌면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손으로 눌러쓴 편지가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일지 모른다. 방송작가이자 손편지 전문작가인 윤성희(44·여)씨는 저서 ‘기적의 손편지’에서 “마음 깊숙이 진심을 전하기 위해선 조금 더 많은 시간과 조금 더 정성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다”며 SNS 소통의 한계를 꼬집는다.

 

그러면서 그는 “편지를 일단 써보라”고 조언한다. 아름다운 문장과 글씨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최대한 솔직하고 편안하게 쓰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편지가 서툰 이들에게 ‘7대3 법칙’을 귀띔했다. 받는 사람의 이야기를 70%, 내 이야기를 30%로 쓰는 것을 말한다. 상대에게 내 추임새나 표정을 보여줄 수 없는 만큼 상대방의 이야기에 더 초점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답장에 대한 기대를 버리는 것’이다. 윤 작가의 말마따나 “‘기브 앤드 테이크’가 아닌 ‘기브 앤드 기브 앤드 기브’를 실현한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수 있다. 글 쓰는 것이 정 어려우면 인사말을 포함해 두세 줄만 써도, 인터넷에서 검색한 시 한 편 적어 보내는 것도 좋다. 그러니 이번 주말, 편지 한 통 써보는 건 어떨까. “가을이라 써봤다”는 제법 그럴듯한 핑계도 있으니 말이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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