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는 일본이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게 패한지 75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에 해마다 돌아오는 8월15일은 그냥 전쟁이 끝났다는 뜻의 ‘종전기념일’이지만, 승전국 미국은 매년 8월15일을 ‘일본을 상대로 이긴 전승기념일(Victory over Japan Day)’, 줄여서 ‘VJ 데이’라고 부르며 기념한다.
29일 미국 국방부 홈페이지에는 미국과 일본이 싸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태평양전쟁(1941년 12월∼1945년 8월) 역사를 갖고서 만든 퀴즈가 게재돼 있어 눈길을 끈다. 대(對)일본 승전 75주년을 기리는 게 목적이다. 태평양전쟁의 주요 키워드 가운데 4가지를 뽑아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형식인데 미리 정답을 얘기하면 진주만, 미드웨이, 이오지마, 그리고 나가사키다.
◆전쟁의 시작점 : 진주만
‘미국은 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었나’라는 첫번째 질문의 답변이다. 1941년 12월7일 일본은 해군 항공모함을 거의 총동원하다시피 해 하와이 쪽으로 보냈다. 미국 시간으로 일요일이던 그날 아침 항모에서 일제히 출격한 일본 전투기들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 해군기지를 공습했다.
여러 척의 군함이 폭격을 맞고 수많은 수병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군함은 그대로 침몰하기도 했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미군도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에 나섰으나 일본군에 아주 경미한 손실만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미국 여론은 크게 악화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은 “1941년 12월7일은 미국 역사에 ‘국치일’로 기록될 것”이라며 군을 강하게 질책했다. 큰 피해를 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전격 보직 해임되고 소장 계급이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단숨에 대장으로 진급해 새 태평양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니미츠 제독과 그의 사령부는 일본을 상대로 한 반격을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한다.
◆전쟁의 반환점 : 미드웨이
‘태평양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어디인가’라는 두번째 질문의 답변이다. 진주만에서 뼈저린 패배를 당한 미 해군은 일본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 절치부심하던 차에 그로부터 꼭 6개월 뒤인 1942년 6월 마침내 기회를 잡는다. 서태평양의 미국령 섬인 미드웨이를 점령하기 위해 일본 함대가 몰려온다는 사실을 먼저 파악한 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태평양함대에 지시를 내렸다. 미드웨이 인근 바다에 가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 함대가 출현하면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것이 미군의 작전이었다.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 4척, 미 해군은 항공모함 3척을 동원해 숫적으로는 일본이 앞섰다. 하지만 전투기 조종사들의 기량과 사기 면에서 미군이 좀 더 우수했고 운도 많이 따라줬다. 미 해군은 일본 해군의 항모 4척을 모두 격파함으로써 태평양의 제해권을 도로 차지했다.

◆마지막 장애물 : 이오지마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어디인가’라는 세번째 질문의 답변이다. 이오지마는 일본 도쿄 남쪽 해상 오가사와라 제도 중앙에 있는 화산섬이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유황도(硫黄島)다.
일본의 패색이 완연해진 1945년 2월 당시 일본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던 미군이 이 섬에 상륙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미 해병대 간에 사상 유례없이 치열하고 잔인한 전투가 벌어졌다. 2월19일 시작한 싸움은 3월26일까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미군이 이 작은 섬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희생한 병력은 전사자 6800여명, 부상자 1만9000여명으로 도합 2만6000명이 넘는다. 일본은 전사자만 2만명가량 발생했다.
당시 섬을 점령한 미 해병대원들이 섬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은 미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고, 오늘날 미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상징이 되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의해 ‘아버지의 깃발’이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전쟁의 종착점 : 나가사키
‘태평양전쟁 막판에 미국이 두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한 일본 도시는 어디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의 답변이다. 미국은 독일이 먼저 항복하고 난 뒤인 1945년 7월 독일 베를린 인근 포츠담에서 영국, 소련(현 러시아)과 3자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일본을 향해 ‘무조건 항복’을 권유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그러자 미군은 1945년 8월6일 갓 개발한 신무기인 원자폭탄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히로시마는 일본군 통신센터와 병참기지 등이 있던 군사상 요충이었다. 이 폭발로 최소 9만여명에서 최대 16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흘 뒤인 1945년 8월9일에는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하됐다. 사망자는 6만∼8만명으로 추산된다. 결국 그로부터 6일이 지난 8월15일 일본 정부는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원래 미군은 두번째 원폭 투하 대상 도시로 고쿠라를 지목했으나 8월9일 당일 고쿠라 상공의 날씨가 좋지 않자 나가사키로 계획을 변경했다. 수만명의 ‘운명’이 날씨 때문에 결정된 셈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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