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를 둘러싼 온갖 의혹이 불거지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군함도 등 메이지 시대 산업 시설이 한국인 강제노역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리겠다는 등재 당시의 약속은 헌신짝이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제대로 기억하고, 알리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광복절을 즈음해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공개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집이 출간된 것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산업전사’로 치장된 근로동원 초등생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기록원,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 지난 13일 공동포럼을 개최하고 그간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던 일제의 아동·여성 강제동원과 관련된 도서, 신문, 잡지 등의 자료를 공개했다. 해당 자료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잠정 휴관한 도서관이 다시 열리면 확인할 수 있다.
1943년 1월의 매월신보에 실린 ‘나오라. 백의의 천사-조선군에서 육군병원 간호부모집’이란 제목의 기사는 “조선 주둔 일본군 군의부에서 조선인 여성을 대상으로 간호부를 모집해 육군병원에 배치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적십자병원을 중심으로 양성하던 간호부를 이즈음부터 군대에서 직접 동원할 계획을 수립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1944년 3월에 나온 ‘학도동원비상조치요강’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각 도지사와 직할 학교장 앞으로 보낸 문서다. ‘근로가 곧 교육’이라고 표방한 이 요강에 따르면 초등학교 4학년부터 동원의 대상이 됐다.

이런 자료들은 일제가 일본 국내법이 정하는 기준에도 못미치는 어린 학생들과 여성들을 ‘산업전사’니 ‘백의천사’니 하는 허울좋은 이름을 붙여 동원했음을 보여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으킨 일제는 후방의 산업 노동자들도 전선의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보국(報國)한다는 논리로 산업보국운동을 시행했는데 중학교 학생들까지 광산과 공장 등에 동원했다. 여성들을 침략전쟁의 최일선으로 몰아넣기 위해 일본군 가미카제와 같은 자세를 요구하기도 했다.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인 정혜경 박사는 “2011년 일본 고베에서 열린 ‘강제동원 진상규명 전국 연구집회’에서 발표된 조선인 미성년 동원사례는 일본인들도 놀랐을 만큼, 충격적이었다”며 “이들의 연령은 당시(1930~40년대) 국제노동기구(ILO)는 물론 일본 국내법이 정하고 있는 기준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명백한 불법이었다”고 지적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새겨진 특별한 잔인함
“… 계속 갔고 나는 그들에게 빌었어/ 돌아가자고 하지만 나는 던져졌어/ 화물열차에 화물선에 하얼빈에/ 위안소로 군인들이 탄/ 트럭 세 대가 도착했다.”(‘김윤심’ 중)
에밀리 정민 윤의 시집 ‘우리 종족의 특별한 잔인함’(한유주 옮김, 열림원)이 전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은 처참하다. 35편의 시를 통해 “인간의 잔인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시인은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집중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그들의 증언을 재구성한 7편의 시는 비극의 시작과 과정, 해방 후에도 이어진 고통을 전한다.

“고바야시가/ 나를/ 헛간으로 데려갔다 매일 밤/ 군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은 군인이 …”(‘강덕경’ 중)
“그래서 나는 병영을 나와/ 걸었다/ 38선까지 내내 혈혈단신으로 걸었다/ …/ 나는 자궁을 잃었고/ 이제 일흔이다.”(‘황금주’ 중)
시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역사가 한국인의 공동체 의식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도 이 시집이 ‘지속시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시인은 “그렇기에 이 책의 목적은 ‘알림’이 아닌 ‘지속시킴’이 된다”며 “이미 아는 역사라 할 지라도 우리는 꾸준한 감정적, 담론적 참여를 통해 지금까지도 부정되고 삭제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하며 문학이 그 참여를 돕는다고 생각한다”고 한국어판 서문에 적었다.
도드라지는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지만 시인은 “다양한 폭력들, 현대 여성들이 받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필리핀에서 성매매를 한 한국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일상의 불운’은 이렇게 묻는다.
“이 필리핀 여자들과 이 아이들은 나를 못 찾을 거야. 그들의 입 속에는 저열함뿐. … 우리 모두와 함께 분노하고 ‘위안부’ 여성에 관해 읽던 남자들과 같은 남자들인가?”
시인은 “이 책을 읽으며 일본군 위안부뿐 아니라 전쟁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다 이어져 있다는 것을 상기해주셨으면 좋겠다”며 “한국 남성들이 필리핀에서 성 착취를 하고,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 미국인이 한국에서 저지른 일 등이 모두 역사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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