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1977년 행정수도 건설 첫 발표
최종후보 선정했지만 서거후 ‘없던 걸로’
노무현 ‘충청권 이전’ 내걸며 대권 잡아
위헌에 제동… 세종 ‘행정복합도시’ 탄생

“행정수도가 세워져도 대한민국의 수도는 여전히 서울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서울을 국제도시로서 가꾸어 나갈 것입니다.”
세종특별자치시를 만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아니다. 1978년 1월1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 내용이다. 박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한 일차적 이유는 북한과 인접한 수도 서울의 안보 취약성을 고려한 것이었지만 서울의 인구과밀화에 따른 국가 경쟁력 저하도 고려된 결정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한 도시의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불평등과 갈등이 극심해진다고 봤다. 당시 서울 인구는 750만명이었다. 40여년이 흐른 현재 서울 인구는 972만명에 달한다. 박 전 대통령의 예상대로 비대해진 수도 서울은 교통 체증과 부동산값 상승과 같은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반쪽짜리’ 행정도시가 된 세종시에 국회 등 남은 기관을 이전해 ‘행정수도 완성’을 이루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두고 부동산 문제를 회피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며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다. 하지만 국토균형발전과 지속가능한 경쟁력 확보는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 문제로, 행정수도 이전은 그 대안의 하나로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행정수도 이전… 박정희의 백년지대계
‘왜 행정수도를 이전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진지한 대답을 들려주는 건 박정희정부가 마련했던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정치적 표계산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던 박 전 대통령의 백년지대계가 담겨 있다.

박 전 대통령은 1977년 2월10일 서울시청 연두순시를 하는 자리에서 “수도의 인구집중 억제는 여러 가지 다른 정책도 수립해서 강력히 밀어야겠지만, 결국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 행정수도를 다른 데 옮겨야겠다는 게 지금 나의 구상”이라며 행정수도 이전 의사를 밝혔다.
이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백지상태에서 추진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을 수립하기로 하고 대통령 직속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실무기획단을 꾸렸다. 약 2년간 150여명의 국내외 전문가가 해당 작업에 총동원됐다.

서울은 4개의 산이 도시를 감싸고 도시를 가로질러 한강이 흐르는 최적의 입지였지만 안보 차원에서는 취약한 입지였다. 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90㎞인 반면 서울까지는 40㎞에 불과했다. 북한군이 자동차로 30분, 탱크로 1시간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당시 실무기획단은 위치, 개발가능성, 주변산세, 교통 등 철저한 검증을 거쳐 공주군 장기면 일대인 ‘장기 지구’를 최종 후보지로 정했다. 현 세종시의 도심과 서쪽 일대를 포함한 곳이다. 이곳에 정부부처뿐만 아니라 국회와 청와대, 사법부 등을 모두 이전한다는 계획이었다. 전국 어디서든 약 2시간 거리인 행정수도가 있으면 수도권 집중이 완화되고 각 권역과의 연계를 강화해 지방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현 여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부터 추진했던 행정수도 이전 구상의 출발점은 박 전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박 전 대통령의 천도 구상은 197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의 서거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선거 전략, 부동산 민심과 얽힌 수도 이전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충청권 행정수도 건설’을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이후 충청권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를 얻으며 당선됐다. 대선 직후 “행정수도로 재미 좀 봤다”고 한 발언이 알려지면서 수도 이전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노무현정부는 임기 첫해 입법 작업을 완료하고 실무 작업에 돌입했지만 2004년 10월 헌법재판소에서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신행정수도법)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내려지면서 급제동이 걸렸다. 헌재는 국회와 청와대 등이 있는 서울이 헌법이 정한 유일한 수도라는 ‘관습헌법’ 법리를 동원했다. 노무현정부는 위헌 논란을 피하기 위해 청와대와 국회를 제외한 행정부 이전으로 선회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이 만들어진 배경이다.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되찾은 한나라당 이명박정부는 2010년 6월 이른바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며 노무현정부의 행정도시 건설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무산될 뻔한 행정도시 건설은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미래로 가려면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며 수정안을 부결시킨 덕분에 2012년 7월 세종특별자치시 탄생으로 매듭지어졌다. 이로써 청와대와 국회는 서울에 남고 국무총리실과 국방·외교부처를 제외한 행정기관과 그 소속기관 43개, 국책연구기관 15개만 이전한 행정도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태동된 행정도시는 지역균형발전을 기대했던 당초 목표와 달리 ‘길거리 국장’, ‘카톡 과장’으로 상징되는 행정 낭비와 비효율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는 지난달 20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국회·청와대의 세종시 이전을 제안하며 행정수도 이전론에 불을 붙였다. 수도권 부동산값 앙등 상황에서 느닷없이 제기된 행정수도 이전 제안이다 보니 “부동산 정책 실패 책임론을 피하기 위한 국면전환용”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박상인 서울대(행정학과) 교수는 “과거 행정수도 이전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동남권 부울경(부산·울산·경남)에 제조업이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쇠퇴하고 대신 지식산업과 금융, 바이오가 발달하며 수도권에 산업 집중화가 더 심해졌다”며 “예전보다 행정수도를 이전할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다만 경제수도(수도권)와 행정수도로 도시 기능을 제대로 나누려면 중앙정부가 지방에 권한을 이양하는 진정한 분권화와 시장 자율기능을 살린 법제도를 갖춰야 한다”며 “이런 조건을 만들어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행정수도 이전은 정치권의 정략 게임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원식 민주당 행정수도완성추진단장 “서울, 비우는 게 아니라 국제경제도시로 채우자는 것”
“모든 걸 끌어안고도 행복하지 않은 도시, 서울의 위상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행정수도완성추진태스크포스(TF) 단장을 맡은 우원식(사진) 의원은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행정수도 이전은 서울을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새롭게 채우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우 의원은 “서울 여의도에서 국회가 떠나면 이 자리에 ‘4차 산업혁명 캠퍼스’를 만들 수도 있다. 국회 본청 자리에는 교육기관, 의원 회관에는 스타트업 사무실, 도서관에는 데이터거래소를 짓는 것”이라며 “금융센터인 여의도에 4차 산업이 합쳐지면 서울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콩이 보안법 때문에 국제적 금융허브로서의 성격을 잃어가고 있다”며 “뉴욕타임스의 아시아지사가 서울로 옮겨올 예정인데 이참에 여건을 잘 만들면 국제적 경제도시로서 성장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행정수도 이전은 서울에서 행정기관을 내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채울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우 의원은 “서울토박이에 지역구(노원을) 의원으로서 부담이 있긴 하지만, 국가 백년지대계를 위해선 모든 걸 끌어안고도 행복하지 않은 초밀집 도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TF에는 단장인 우 의원을 비롯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고 있다. 우 의원은 야당에 9월 말까지 행정수도완성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한 상태다.
그는 “행정수도 이전 방법에는 개헌과 국민투표, 특별법 제정 등의 방법이 있는데 모두 여야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야당이 끝내 호응을 안 하면 장기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다. 절대 일방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지도부는 당초 청와대와 국회의 세종시 이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나, 현재는 국회 11개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까지 12개 상임위 이전을 현실가능한 대안으로 보고 있다. 이전부터 추진해왔던 세종 국회 분원 설치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의 집무실과 국회 본회의장은 헌법재판소가 ‘관습헌법’ 법리로 해석한 ‘수도’에 속해 위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세종 이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우 의원은 “추진단이 청와대 이전이나 대통령 제2집무실을 세종에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일부 보도는 사실이 아니다”며 “청와대 이전은 국민 여론이 뒷받침되지 않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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