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생각해봐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작년 이맘때 법무장관 후보에 지명된 조국은 자신의 이중적 언행으로 여론의 포화를 맞자 이순신 장군에게 SOS를 쳤다. 검찰개혁을 들먹이며 서해맹산(誓海盟山)을 읊조렸다. 서해맹산은 ‘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다짐한다’는 장군의 진중 어록이다. 나라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나타낸 말이다.
이순신은 충무공의 시호에서 보듯 충(忠)의 화신이다. 한자 忠은 中(중)과 心(심)으로 이뤄져 있다. 한가운데에 있는 참마음이라는 뜻이다. 두 마음의 역심을 품지 않는 것이 충이다. 충과 대비되는 글자는 아플 환(患)이다. 患을 파자하면 中, 中, 心이 된다. 중심이 두 개라는 것이다. 중심이 둘이니 마음이 어지럽고 아플 수밖에 없다. 충무공의 마음이 충심 하나뿐이라면 조국은 충심 외에 사심이라는 두 마음을 가졌다. 사심의 조국이 충심을 흉내 내는 것은 참칭이다.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자후를 토해냈다. “무릇 장수 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충무공의 정신은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상통한다. 민주의 개념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이고, 그것을 제도화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요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리가 높다. 국회 상임위를 독식한 거대 여당의 폭주는 갈수록 가관이다. 부장검사가 검사장을 바닥에 넘어뜨리는 하극상이 일어나고, 집권층에선 성추행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의 뜻을 받들겠다고 한다. 위안부 할머니에 기생한 파렴치한이 버젓이 금배지를 달고 활보한다. 이런 부조리가 횡행하는 것은 집권세력의 마음이 중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라의 중심인 국민이 아니라 권력을 향한 탓이다. 나라가 병들고 국민이 아픈 이유다.
북미 인디언 사회에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있다. 낮과 밤의 경계에 있는 어스름 황혼이나 이른 새벽을 가리킨다. 날이 어둑하면 저 언덕 너머로 다가오는 물체가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까닭이다. 곧 태양이 뜰 것이다. 달은 자취를 감추고, 어느 쪽이 개이고 늑대인지 훤히 드러날 것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