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8월1일 나일강 하구에서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에게 대패한 것은 나폴레옹에게 ‘불가능’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코르시카 출신인 데다 키도 작아 별 볼일 없는 하급 장교였으나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빈발한 소요와 외국군의 침략에 대처해 승승장구하다가 처음으로 패배를 맛본 것이다.
나폴레옹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이집트 원정군을 지휘하게 됐던 것이다.
당시 나폴레옹의 정적들은 무섭게 권력이 세지는 그의 기세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이집트 원정에 그를 내몬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런 정황을 눈치 챘건 아니건 그는 의욕적으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이집트를 장악하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막는 것이자 오스만투르크 세력을 제압하는 것이어서 그의 구상과도 부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새삼 영국이 섬나라라는 초보적 지리 상식을 비싸게 배워야 했다. 보다 불길한 것은 장차 그의 생애를 멍들게 할 ‘호레이쇼 넬슨’ 이라는 이름에 접하게 된 점이다. 그날 프랑스의 패배도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넬슨의 전술 때문이었다.
오후 6시쯤 양측 군대가 조우하자 프랑스 측은 그런 경우 의례 그렇듯 다음날 아침에 본격적 전투가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넬슨은 해가 수평선에 떨어질 무렵 공격을 가함으로써 의표를 찔러 주도권을 잡았다.
프랑스군은 병력도 우위였다. 하지만 노를 신속히 저으며 상대의 허를 찌르는 능력은 섬나라 수병들이 단연 위였다.
패배한 나폴레옹은 얼마 후 귀국해 1799년 11월9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유럽 전역을 호령한다. 그러나 불과 6년 뒤의 트라팔가르해전에서 또 한 번 넬슨이라는 이름 앞에 좌절한다.
이에 그는 섬나라를 제압할 유일한 길로 보이는 대륙봉쇄령이라는 고육책을 써야만 했고 결국은 망했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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