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강압적인 체포로 사망한 후 미국 전역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인종차별과 소수자 혐오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사실 피부색, 성별, 종교, 국적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고, 살해되는 일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끊이지 않을까. 미국의 사회변혁 운동가인 저자 데릭 젠슨은 ‘문명과 혐오’에서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가 바로 혐오의 정치경제학이며, 누구나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원제는 ‘The Culture of Make Believe’, 즉 ‘믿게 만드는 문화’이다. 특정 인종과 민족, 성별에 대해 가해진 혐오의 역사와 사회적 뿌리를 문명사 전체를 관통해 분석하고 있다.
책에는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이 열거된다. “에드워드 앤토니 앤더슨, 1996년 1월 15일, 바닥에 엎드린 채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에 맞다. 프랭키 아르주에가, 15세, 1996년 1월 12일, 머리 뒤쪽에 총을 맞다. 그다음 날인 어머니날, 그의 가족은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비아냥거리는 전화를 받았다. 회신 다이얼을 누르니 경찰이 나왔다.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시 길거리에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 당하다. 르니 캠포스, 수감 중이던 그가 자기 목에 티셔츠를 절반 이상 쑤셔 넣어서 자살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폐에 이르는 기관의 4분의 3까지 티셔츠가 쑤셔 넣어져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찰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과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으면서도 다양하고 끔찍한 사례들이 적나라하게 발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타자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방식임을 반영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민족 외에 다른 이유 없이 학살당했듯이, 많은 여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강간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 땅 어디에도 인디언의 피가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게으르다’는 이유로 땅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죽임을 당한다. 그렇다면 학대와 살인들을 저지른 이들은 누구일까. “피가 흘러내리는 심술궂은 입에 뼛조각과 살덩어리를 물고 있는 미치광이들일까?” 아니다. 저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훨씬 더 가까운 무엇이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지극히 평범한 이웃이라는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젠더, 계급을 관통하는 모든 혐오의 문화 배후에 ‘생산’이 자리하고 있다. 저자는 생명보다 생산을 중시할수록 개인의 인격의 소중함보다 제도적 잣대를 먼저 들이대는 사회적 믿음이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문화적·개인적 역사를 갖췄고 욕구와 희망을 갖춘 같은 인간임에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생산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향상될수록 추상성 역시 커지면서 개인들 간의 유대의 끈이 사라진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혐오 현상이 더 심해진다는 뜻이다.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살인도 용이해진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기술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당화하든 코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아야만 했다.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던 정복자들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식어가는 체온을 직접 느껴야만 했다.

저자는 ‘생산’을 불교의 ‘아귀 개념’이 현실에서 구현된 것으로 본다. 먹을수록 채워지지 않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에 스스로가 소멸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돈은 만져지지 않는다. 우리가 만지는 것은 종이지 돈이 아니다. 돈은 숫자다. 그렇기에 내가 얼마나 배불리 먹었는지를 느낄 수가 없다. 그 끝이 정해질 수 없는 숫자이기에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차별과 배제, 혐오는 문명의 형성과 함께 시작됐다. 데릭 젠슨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노예제를 그 근거로 든다. 고대 문화의 꽃, 헬레니즘은 노예제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 국가도, 그리스 예술과 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유럽 국가도 없었을 것이고, 문명이 주는 고상함과 안락함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문명의 기본 조건은 바로 타인과 자연에 대한 착취다.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구체로 돌아가자’이다. 누구나 생산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격을 갖춘 본연의 모습 그대로로 대하자는 의미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이런 짙은 어둠의 시대에도 혐오와 자기합리화의 문화를 극복하는 변화를 위한 개인·사회·국가의 실천 의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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