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에서의 여유로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로 향한다. 그라나다로 가는 길은 코스타델솔(태양의 해변)을 뒤로하고 내륙으로 향하고 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자치지방의 그라나다주(州)의 주도로서 스페인어로 ‘눈 덮인 산맥’이라는 의미를 가진 험준한 산악지역인 시에라네바다산맥 북쪽에 위치해 있다. 기독교 세력의 공격에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이슬람 왕국답게 해발 738m의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국립공원으로 보호되고 있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은 이름답게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3481m의 몰아센산을 포함해 눈 덮인 봉우리들로 이어져 있으며 일부 지역에는 빙하도 남아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도 유명한 같은 이름의 산맥이 미국의 동부에도 존재하는데 높은 봉우리의 설산을 본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름에 걸맞게 겨울철에는 겨울스포츠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시에라네바다산맥으로 모여들면서 그라나라는 1년 내내 관광객으로 붐비는 도시이다.
그라나다는 르네상스 건축, 21세기에 걸맞은 현대적인 시설들도 매력적이지만 1492년 기독교 세력에게 정복당하기 전까지 이 지역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의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다. 유럽을 지배했던 로마가 몰락하자 711년 아랍계 무어인들은 지중해를 넘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고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하지만 이슬람 왕국들 내부의 반목과 분열이 심해지고 기독교 세력들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문명을 몰아내기 위한 레콩키스타(reconquista·국토 회복 운동)로 단결하면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뒤로하고 고지대에 위치한 그라나다 왕국은 이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이슬람 왕국이었다. 하지만 1492년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에스파냐 연합왕국이 그라나다를 정복하면서 약 7세기 반에 걸쳐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은 축출되었다. 이로써 레콩키스타가 완료되고 이베리아반도는 스페인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랜 통치 기간 이슬람 세력은 그라나다에 알람브라 궁전을 포함해 수많은 문화유산을 남겼고 그들의 예술적 안목과 재능은 지금도 전 세계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간 스페인 왕국 역시 자신들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 문화적 전성기를 열어갔다.
수세기 동안 아랍계 무어인들과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쌓아온 문화의 보고, 그라나다로 들어서는 길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하다. 구시가지로 들어선 길은 좁은 골목길의 연속이다. 차 한대 지나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길을 따라 알바이신(Albayzin)에 자리한 숙소를 찾는다. 호텔이 아닌 작은 주택을 개조한 숙소는 오래전 중세시대의 느낌이 더 강하다. 체크인을 하고 짐을 푼 뒤 발코니로 나서니 맞은편으로 수세기 전의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마치 무어인들이 떠난 직후의 스페인 왕국에 들어서 있는 듯한 흥분으로 몰아넣는다.
구시가지의 언덕 위에 자리한 숙소는 알람브라 궁전을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인 성 니콜라스 전망대 근처에 위치해 있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시간 여유가 많아 무어인의 흔적을 찾아 도보 여행을 나서기로 한다. 담벼락 어디선가 재스민 향기가 넘실댄다. 향을 품은 미로의 좁은 거리는 알바이신을 통과하며 흩어진다.
알람브라 궁전과 인접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알바이신은 이슬람교도들이 처음으로 요새를 쌓았던 곳으로 그라나다가 함락되자 이슬람교도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특히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건축과 무어인들 특유의 건축물이 조화롭게 섞여 있는 주거지역으로서, 언덕 위쪽으로 가파른 비탈길이 뻗어 있고 길옆으로 작은 창이 달린 하얀 집들이 오밀조밀 늘어서 있다.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알바이신 지구의 중심 라르가 광장을 지난다. 조심스레 언덕을 내려오니 안달루시아 문화유산인 옛 아랍 옥수수 거래소와 유명한 꽃 시장을 지나게 된다. 아랍 공예품을 살 수 있는 거리를 따라 걸으며 이리저리 골목길을 헤맨다. 매력적인 이슬람 건축물 팔라시오 데 라 마드라자가 있다.
가까운 거리에 가톨릭 군주들이 묻혀 있는 로열 채플은 그라나다 성당으로 이어진다. 흰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대성당은 16~18세기 초에 걸쳐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호화로운 스테인드글라스 돔이 유난히 눈에 띄며 원래 고딕 양식의 배치였지만, 당대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인 디에고 데 실로에의 계획에 따라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완성되었다고 한다.
대성당 밖으로 나서니 조금은 시원한 실내와 달리 따뜻하게 열기를 품고 있는 성당 주변의 대리석 계단에 앉는다. 석양에 따라 반사되는 성당의 빛깔이 시선을 붙든다. 성당 주변을 에워싼 관광객들과 올곧이 서 있는 성당을 번갈아 둘러보며 이슬람의 왕들과 가톨릭 군주들이 마지막 열정을 쏟았던 왕국의 흔적을 마주한다. 오래전 무어인들과 기독교인들 역사와 문화가 이 작은 도시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라나다의 거리를 걸으며 지는 해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한다.
박윤정 여행가·민트투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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