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름장어’는 원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별명이다. 2003∼2004년 노무현정부에서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일할 때 생겼다. 기자들이 아무리 까다로운 질문을 던져도, 듣는 사람 기분 상하지 않게 매끄럽게 비켜 간다고 해서 옆에서 지켜보던 청와대 관계자들이 감탄하며 붙여줬다. 당시는 ‘노련하다’는 칭찬의 성격도 담겨 있었다. 반 전 총장도 공사석에서 이 별명의 유래를 적극 알릴 정도로 거부감이 없었다.
2016년 말 반 전 총장이 보수 진영 대선주자로 급부상하자 더불어민주당은 ‘요리조리 살살 피해 나간다’는 기름장어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며 집중 견제에 나섰다. 기동민 당시 원내대변인은 “(반 총장이) 기름장어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교묘히 빠져 나갈 생각만 하고 있다” “‘제2의 기름장어’라는 세간의 지적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대권 놀음은 그만두고 민생과 국정혼란을 수습하는 데 전념하길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이낙연 전 총리의 이천 화재 참사 조문 논란에 기름장어가 다시 등장했다. 지난 5일 일반 조문객 자격으로 이천 화재 참사 합동분향소를 찾은 이 전 총리는 대책을 요구하는 유족들에 “책임질 수 있는 말을 할 위치가 아니다” “제가 국회의원이 아니다” 등의 답변을 했다. 신중하고 절제된 언어가 특장인 이 총리가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자 조수진 미래한국당 대변인은 과거 민주당의 논평을 인용해 이 전 총리를 ‘기름장어’라고 몰아붙였다. 호된 비판이 이어지자 이 전 총리는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 전 총리와 가까운 박지원 민생당 의원은 한때 대세론까지 형성했으나 결국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이회창, 고건 전 총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 전 총장도 2017년 1월 귀국 후 퇴주잔 논란 등이 이어지며 중도하차했다.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면 이 전 총리는 이천 합동분향소같이 정제되지 않은 현장과 맞닥뜨릴 일이 많을 것이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방에서 검증의 칼날이 날아들 게다. 이 전 총리도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박창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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