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과 이미숙·전인화·김혜수’, ‘김명민과 최민식’
한국 최고의 배우들로 꼽히는 이들은 의외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윤여정 등은 1970년대 이후 TV 드라마에서 장희빈을 연기했고, 김명민과 최민식은 이순신으로 분해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장희빈과 이순신이 최고의 연기자들을 출연시킨 드라마, 영화 등의 주인공으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수백년 전의 인물이지만 이들이 강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지금의 지식, 이미지 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아는 그들은 지금의 시각에 따라 가공된 정체성을 가진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그들이 직접 작성했거나, 가까웠던 당대의 인물들이 쓴 글인 ‘사료’(史料)를 읽는 게 가장 좋다. 해당 인물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혹은 보다 깊은 이해를 쌓아가는 것도 사료 읽기의 재미다.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어려운 번역이 많아 독해 자체가 고역이라는 점. ‘사료와 함께 읽는 평전, 사람과 그의 글’은 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사연구관이 역사 속 인물 23명과 관련된 사료를 뽑아 엮은 책이다. 해당 인물을 그려낼 수 있는 핵심적인 글을 선택해 일반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정리했다.

◆‘아들을 위하여’…장희빈, 남편이 강요한 죽음
조선의 역사에서 임금을 낳았으나 죽임을 당한 이로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있다. 두 여인의 비극적 죽음은 남편인 성종과 숙종의 처분에 따른 것이었다. 1482년 사약을 내리면서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해 “흉험하고 악역한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며 “지금 원자(연산군)가 점차 커가는데…훗날의 근심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조치를 정당화했다.
200여 년이 지난 뒤인 1701년 10월 숙종이 장희빈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을 내릴 때도 같은 논리가 동원됐다. 이 해 ‘숙종실록’의 기사에는 숙종의 장희빈을 향한 분노가 분명하게 표현돼 있다.
“(장희빈의 행위에 대해) 신령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고 있다. 이 사람을 그대로 두어 훗날 뜻을 펴게 된다면 나라의 근심을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자신의 결정이 깊은 고뇌 끝에 나온 것임을 밝혔다.
“아! 세자(경종)의 마음을 내 어찌 생각하지 않겠는가?…생각하고 생각하고 다시 깊이 생각했지만 일이 이미 이렇게 됐으니 이 처분 외에 참으로 다른 도리가 없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이순신이 기록한 병사들
이순신은 국가의 위기를 끝장낸 불세출의 무장이었으나 많은 글을 남긴 “문기(文氣)가 그윽한 드문 무인”이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등재된 ‘난중일기’가 이순신의 이런 정체성을 대변한다. 김 연구관은 “무인은 그 삶 자체가 다른 사람보다 위험하고 비장하다. 그래서 그들의 글에는 장식이나 기름기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소개했다.
책에 담긴 글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히는 ‘한산대첩’의 경과를 조정에 보고한 장계이다. 이 글에는 전투에 참여한 많은 이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눈에 띄는 것은 지휘관뿐만 아니라 신분이 낮은 격군, 사노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노 풍세, 포작 마구지·망기·흔복 등은 탄환에 맞았지만 중상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각오하고 나아가 싸워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는데…”
김 연구관은 “이 기록에 힘입어 그들-특히 아무 자취없이 사라지기 쉬웠을 수많은 군졸-의 이름이 역사에 남게 됐다”고 평가했다.

◆세종,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위대한 군주
한글 창제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로 꼽히기 때문에 이에 격렬하게 반대한 최만리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1443년 12월 한글이 창제되고 이듬해 2월 세종이 ‘고금운회거요’라는 책의 한글 번역을 지시하자 최만리는 부하 관원들과 함께 한글을 “천박하고 무익한 글자”라고 규정한 ‘갑자상소’를 올렸다.
주장의 첫번째 근거는 사대주의 정책이었다. 그는 “이 일이 중국에 알려져 비난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사대와 모화에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라고 세종을 압박했다. 한자를 우리식으로 활용하는 ‘이두’가 있어 “수천 년 동안 사용해 오면서…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처럼 폐단없이 오래전부터 이용하던 문자를 고쳐서 천박하고 무익한 글자를 새로 만든단 말입니까”라고 묻기도 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지독한 ‘꼴통’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김 연구관은 최만리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으나 시대의 제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것은 최만리만의 문제가 아닌 양반 대다수가 극복하지 못한 보편적인 한계라고 평가했다. 그는 “조선의 기본적 외교 방침인 사대의 원리를 부정할 수 있는 지식인은 드물었다. 최만리는 이런 시대의 조선에 충실했고, 대부분의 양반이 한글을 오래도록 천시하고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것이 보편적인 한계였음을 또렷이 보여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세종에게는 어떤 평가가 가능할까. 최 연구관은 이렇게 정리했다.
“최만리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의 수장을 지낸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 지식인도 넘거나 깨닫지 못한 한계 너머를 본 유일한 사람은 위대한 국왕 세종이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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