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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곽재우와 정암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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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4-17 22:09:44 수정 : 2020-04-17 22: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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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쟁에 대한 준비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맞이한 초반 전투에서 관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왕인 선조는 국경의 거의 끝자락인 평안도 의주까지 피난을 하면서 백성들을 실망시켰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반격의 물꼬를 틔우는 움직임들이 포착되었다.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더불어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활약이 그것이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령을 거점으로 한 곽재우였다. 1592년 4월 22일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상황을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을 취득하였습니다”라고 ‘선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곽재우가 승리를 이끈 대표적인 전투가 정암진(鼎巖津·사진) 전투이다. 경상도 의령 남강변에 위치한 정암진은 일본군들이 진주를 거쳐 호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곽재우가 지휘하는 의병은 7월 4일 일본군 정찰대가 밤에 표시해 두었던 푯말의 위치를 옮겨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좋은 지점으로 유인했다. 7월 5일 새벽에는 푯말을 따라 이동하던 일본군을 기습했고, 강변의 습지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났다. 오희문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 상황을 정리한 일기 ‘쇄미록’에도, “곽재우가 군사를 의령의 정암진에 주둔하자 적이 건너지 못하고 김해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뿐 아니라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고, 이들의 대대적인 활약은 국난 극복에 큰 힘이 되었다. 왜란을 극복한 의병들의 행적은 코로나19 사태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의료진, 방역 대책에 적극 호응하며 코로나를 극복해 나가고 있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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