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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성차별, 외국서 겪는 인종차별보다 더 무서워” [연중기획 - 청년, 미래를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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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4-18 20:00:00 수정 : 2020-04-19 09: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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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 탈출 선택한 청년들 / 국내 불공정성 문제 여성이 더 민감 / 성별 따른 임금격차 女 83% “부당” / 능력·성 수평적인 문화 선호 늘어 / 47% “해외취업도 고려중” 응답 / 깨끗한 대기 등 환경문제도 영향 / 현지인과 관계 맺기 등 난제 많아 / 해외이주 장밋빛 미래 보장 안 해

“인종차별을 당할지언정 성차별이 적은 국가에서 사는 게 나아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는 정민주(26·가명)씨는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에 겪지 못한 인종차별을 당하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던 한 현지인이 마스크를 쓰고 걷는 그를 쳐다보며 기침하는 흉내를 내는가 하면, 마트 점원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결제를 거부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정씨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인종차별 문제가 두드러지고 있지만 한국에서 겪은 ‘성차별’보다는 낫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정씨는 지난해 5월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에 있는 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의 한국지사에서 일했던 그는 본사 근무를 자원했다. 정씨의 미국행은 약 5년 전 대학생 신분으로 다녀온 교환학생 경험이 계기가 됐다. 당시 만난 미국인 남자친구와 장거리 연애를 이어왔고 미국은 그가 꿈꾸던 개발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곳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겪었던 성차별은 정씨가 미국 생활을 꿈꾸게 한 중요한 이유다. 그는 “이곳도 여성이 월급을 적게 받고 다양한 성차별이 있다”면서도 “적어도 일상에서 옷차림이나 얼굴, 몸매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나를 그대로 드러내며 살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한국을 떠나 해외에 정착하는 청년들의 행렬이 지속하고 있다. 보다 나은 취업의 기회를 찾아가거나 보다 수평적이고 성 평등한 문화를 찾아 떠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청정한 자연환경도 이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됐다. 반대로 한국 사회의 취업난과 위계적·성 불평등한 문화, 환경문제가 청년들이 한국 사회를 ‘헬조선’(대한민국이 지옥처럼 살기 힘들다는 말을 풍자적으로 이르는 말)으로 인식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헬조선도 성별에 따라 달라

헬조선을 경험하고 있는 청년들이 ‘탈조선’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드러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청년 관점의 젠더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 대응방안 연구 - 공정 인식에 대한 젠더 분석’에 따르면 청년 10명 중 8명은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한국을 떠나 살고 싶다는 ‘탈조선’ 응답도 75.4%에 달했다.

전국 성인남녀 5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자료에서 특히 남녀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우울, 분노 등을 나타내는 울분 척도는 4점 만점 중 여성의 경우 2.73점, 남성은 2.56점으로 나타났다. 20∼30대를 청년세대로, 40대 이상을 기성세대로 구분했을 때 청년 여성 집단의 울분 척도가 2.79로 가장 높았다. 청년 남성은 2.53을 기록해 기성 남성보다도 낮았다.

한국의 불공정성에 대해 느끼는 정도도 여성이 더 컸다. 한국 사회가 불공정하냐는 질문에 여성은 86.1%, 남성은 78.4%가 그렇다고 답했다. 특히 소득 및 임금 격차에서 성별에 따른 격차가 부당하다고 인식하는 비율은 청년 여성 82.8%, 기성 여성 85.6%인 데 비해 청년 남성은 42.7%에 불과했다. 탈조선을 원하는 응답도 청년 여성은 79.1%, 청년 남성은 72.1%로 차이가 났다. 정씨가 인종차별보다 한국의 성차별을 더욱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별난 이야기가 아님을 뒷받침하는 결과다.

 

◆능력 위주의 수평적인 문화

한국에서 로봇공학을 전공한 장경훈(28·가명)씨는 3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앞길이 막막했다고 한다. ‘대학생활 3년을 연구실에 갈아 넣었지만’ 취업할 때가 되니 영어 성적도 학점도 마땅치 않았다. 어학연수를 가기에는 비용이 부담됐던 장씨는 수개월을 준비한 끝에 정부가 지원하는 미국 인턴 프로그램에 합격했다.

당초 인턴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생각이었던 장씨는 1년간 현지 가전제품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미국에 정착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인턴을 마친 그는 현지 취업을 목표로 인디애나주의 한 대학원에서 광학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장씨의 이런 결심은 엔지니어에 대한 후한 대우와 수평적인 문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장씨는 “같은 직종의 업무를 하는 경우 한국보다 두 배 정도의 연봉을 받는다. 기업의 이름값보다는 내 능력에 따라서 성과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회사나 학교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 교수와 학생 관계가 위계보다 협력의 관계로 인식되는 것도 ‘합리적’으로 보였다.

장씨와 같이 보다 다양한 기회를 얻기 위해 해외취업을 희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17일 산업인력공단의 연도별 취업통계에 따르면 2014년 1679명이던 해외취업 청년 수는 해마다 늘어 2016년 4811명, 2018년에는 5783명을 기록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의 지난해 ‘하반기 취업트렌드’ 설문조사에서는 1118명 가운데 47.6%가 국내 취업이 안 되면 해외취업을 고려하겠다고 응답했다.

해외취업을 생각하고 있는 지역(복수선택)으로는 미주가 33.5%로 가장 많았고, 유럽(23.9%), 일본(14.1%) 등 순이었다. 미주를 선호한 가장 큰 이유로는 ‘다양한 기회’(공평한 기회와 보상, 다양한 산업군과 한국보다 덜한 차별)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 유럽의 경우는 ‘복지’(한국보다 나은 근무 환경과 여유로운 삶)가 꼽혔다.

◆‘미세먼지 없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한국의 미세먼지 발생 빈도가 높아지는 등 환경문제가 일상화되면서 깨끗한 대기와 잘 보전된 자연환경도 해외 이주를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 밀집해 살아온 청년들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자연을 만끽할 환경을 매력적으로 느끼기도 한다.

미국에 사는 민주씨는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바닷가와 국립공원을 갈 수 있다는 점을 ‘미국살이’의 최대 장점 중 하나로 꼽는다. 그가 주로 머무는 도심도 서울 못지않게 공기 질이 좋지 않지만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이국적이고 잘 보전된 자연환경이 그에게 휴식처가 된다.

3년 전부터 호주에 사는 김예나(29·가명)씨도 이곳의 자연환경에 푹 빠졌다. 서핑을 좋아하는 그에게 호주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김씨는 “호주에 도착한 날 파랗고 맑은 하늘과 바다를 마주한 순간 이 나라에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한국과 비교하면 호주는 느리고 답답하지만 환경문제에서는 굉장히 민첩하게 대응한다. 이곳 사람들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지내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장밋빛 미래만 기대했다가는 실망도

영주권 취득을 눈앞에 둔 김씨는 바라던 호주에서의 삶을 살고 있지만 현지인과의 관계 맺기는 여전히 난제다. 김씨는 “자신을 굉장히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 사람들을 알아갈수록 더 이질감이 느껴졌다”며 “조금은 가까워져도 깊이 있는 관계를 만들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마음을 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선진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도 한다. 정씨는 코로나19를 계기로 미국의 민낯이 드러났다고 지적한다. 그는 “미국은 평소 이런 수준의 위협을 느낄 일이 없어서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생존에 대한 공포가 덮치자 인종차별 같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청년의 탈조선이 본인에게 보다 유리한 환경을 찾아가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면서도 기대와 달리 ‘이방인’으로서 맞닥뜨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학자인 오찬호 작가는 “과거 세대와 지금 청년세대는 달리 해외로 나가는 것에 낯섦, 두려움이 적어 심리적 문턱이 낮다”며 “한국의 상황이 본인에게 별다른 메리트(장점)가 없어 이주를 결심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현주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장은 “특히 여성 입장에서 기회는 적고 열심히 노력해도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라며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으려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코로나19 여파로 일자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이주 청년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 있다. 현지인보다 재난지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이방인의 이질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설동훈 전북대 교수(사회학과)도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는 적응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성 불평등은 없지만 인종차별을 겪는 것처럼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종민 기자 jngm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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