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은 호텔에서 일할 수 없나요?” 수단 출신 A씨는 지난해 1월 국내 한 호텔과 도급 계약을 맺은 세탁업체로부터 채용을 거절당했다. 담당자가 채용을 염두에 두고 업무와 근무지에 대한 설명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런데 이튿날 업체 측은 A씨한테 채용할 수 없다고 문자메시지로 통보했다. 이유는 그의 검은 피부색이었다. 업체 측은 A씨에게 “호텔 세탁실 매니저가 A씨 때문에 세탁실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남편을 만나 이주해 온 지 14년 된 B(36·여)씨도 한국인들의 인종차별 행태에 할 말이 많다. 그는 “한국인은 외국인이라고 하면 일단 경계한다”며 “한국말이 서툴거나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B씨는 한국인이 외국인을 이중적으로 대하는 태도도 지적했다. 그는 “잘사는 나라에서 온 백인의 경우 덜 차별받는다. 하지만 같은 아시아계이면서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에 대해서는 차별이 심하다. (결혼이주여성) 대부분 그렇게 느낀다”고 했다.

◆“피부색·출신 국가로 외국인 차별”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느끼는 혐오와 차별은 피부색과 출신 국가, 인종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백인들은 한국인을 ‘친절하다’고 느꼈지만, 같은 아시아계는 더 많은 불친절을 경험했다. 한국인들이 피부색은 물론 인종, 출신 국가 등에 따라 외국인을 서열화하고 계급 짓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뜻이다.
24일 세계일보가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 207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외국인들은 피부색, 출신 국가, 인종, 직업 등에 따라 차별과 혐오의 강도를 다르게 느꼈다.



한국인의 외국인 차별과 피부색은 얼마나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매우 관련 있다’는 응답이 33.3%로 나타났다. ‘조금 관련 있다’고 응답한 인원도 34.3%에 달했다. 전체 응답자 10명 중 7명이 ‘한국인은 피부색에 따라 외국인을 차별한다’고 답한 것이다. 한국이 인종차별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외모가 달라서’(57.5%·복수 응답)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한국인에게 차별대우 또는 혐오 공격을 받았다는 응답도 전체의 70%에 육박했다. 차별을 보거나 들은 경험은 85.5%에 달했다. 차별의 형태는 ‘경계하는 눈빛, 몸짓 등 간접적 차별’(32.9%)이 가장 많았고, ‘폭언 등 인신공격’(16.4%), ‘임금차별 등 부당한 처우’(10.6%), ‘폭행 등 물리적 차별’(3.4%)의 순으로 조사됐다.


외국인들은 차별과 혐오를 경험해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차별에 어떻게 대처했느냐는 질문에 ‘인권위 등 기관에 신고했다’는 응답은 2.9%에 그쳤다. 반면 ‘참거나 모른 척했다’는 답은 62.8%에 달했다.
◆한국인은 ‘백인’에만 친절하다?
주목할 부분은 비슷한 피부색을 가진 아시아권 출신을 차별하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응답자들은 어떤 국가 출신이 한국에서 더 차별을 받는지에 대해 ‘필리핀·베트남 등 동

남아 국가’(75.8%·복수응답)를 1순위로 꼽았다. ‘이란·이라크 등 중동 국가’(48.3%)와 ‘중국’(47.3%)이 뒤를 이었다.
한국인이 외국인을 출신 국가에 따라 차별하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또는 ‘매우 관련 있다’는 응답이 전체의 약 44%였다. ‘조금’ 또는 ‘매우 관련 없다’는 응답(29%)보다 15%포인트 웃도는 수치다.


‘한국인은 외국인에게 친절하다’는 말도 특정 인종, 피부색에만 해당했다. ‘당신이 경험한 한국과 한국인은 얼마나 친절한가’를 묻는 설문에 백인의 60%가 ‘약간’ 또는 ‘매우 친절하다’고 응답했다. 반면 같은 질문에 아시아계는 37%만 친절하다고 답했다.
서울의 한 대학에 다니는 스위스 출신 백인 C(30)씨는 “한국인들이 외국인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피부색은 물론 직업, 경제적 상황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베트남 출신 D(32·여)씨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한테는 투명한 장벽이 있다”며 “피부색, 언어만 다를 뿐 틀린 게 아니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차별 없이 대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20∼30년 지나 세대가 바뀌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당장 (인종차별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식 인종차별’
전문가들은 이 같은 차별을 ‘한국형 인종주의’로 진단한다.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우리의 인종주의는 서양의 것을 학습하며 우리만의 버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백인을 정점으로 하고 흑인을 제일 밑에 두는 서양식 인종 질서 안에서 ‘우리는 그 중간 어디 있을 텐데’, ‘위쪽 어디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민족, 문화, 종교라는 변수가 작동하고 경제 수준도 인종차별의 숨겨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며 “다른 비백인인 동남아 쪽 사람들은 밑에 있다는 우리식의 해석을 함으로써 우리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사회는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오래전부터 이어왔다. 유엔은 이미 1965년 12월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을 유엔총회에서 채택했다. 이 협약은 1969년 1월 발효됐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인종과 피부색에 따라 직업 선택을 제약하거나 우대하는 행위 일체를 ‘차별 대우’로 못 박았다. 하지만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를 없애기 위한 우리나라의 노력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등 어느 기관도 ‘인종차별’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한 현실이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배민영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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