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선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국내 확산 우려로 우리 산업계 전반에 드리운 위기감이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지난 1월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여러 국내외 생산기지가 ‘셧다운’ 사태에 직면했던 산업계는 글로벌 수요 감소와 교역 제한 상황에 더욱 몰리면서 공포감마저 느끼고 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의 특성과 그동안 확대된 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이번 위기는 1997년 말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보다 심각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반도체 등 제조업 전반 위기
12일 업계에 따르면, 코로나19의 여파가 각국으로 확산하면서 제조업을 비롯한 거의 분야의 업황 부진이 현실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중추 역할을 담당해 온 반도체 산업은 코로나19로 회복세 위축에 직면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당초 대부분의 시장조사기관은 반도체 시장이 지난해 급격한 하락세에서 벗어나 올해부터는 상당한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란 전망을 내놨다. 코로나19로 상황이 달라졌다. 올해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 공장 가동을 각각 계획 중인데 이번 사태가 변수로 작용했다. 당장 공장 가동 연기를 검토할 상황은 아니지만, 연구개발(R&D)을 포함한 필수 인력파견이 늦어지는 등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입국 제한이 주요 생산기지로 확산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삼성디스플레이는 베트남 정부에 700여명의 엔지니어 입국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아직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현지 플렉시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모듈 공장 인력 투입이 늦어질 경우에는 차기 스마트폰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생산차질·소비위축 이중고 속의 자동차업계
자동차업계도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가장 큰 문제는 소비 위축이다. 자동차는 고가의 소비재여서 대부분 대면 판매로 이뤄지지만, 코로나 확산세가 지속한다면 접촉을 꺼리는 분위기에서 원활한 판매가 이뤄지긴 어렵다. 일례로 코로나19가 강타한 중국에서 지난달 현대·기아차의 판매량은 8100대에 그쳐, 전년 동기 11만3400대에 비해 93%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자동차의 대중국 수출도 36.3% 하락했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현재 코로나19 확산세가 거센 미국과 유럽 등에서도 지난달 중국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장기화될 경우 상황은 매우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차 발표도 줄줄히 연기되거나 취소되는 등 차질이 예상된다. 현대차는 제네시스 G80을 다음달 뉴욕모터쇼에서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행사가 연기됐다. 오는 18일 미국 LA에서 열리는 아반떼 공개 행사도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올해부터 제네시스 브랜드를 유럽과 중국으로 진출하려던 계획도 추후 확산 상황에 따라 수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미국과 유럽, 인도 등에 현지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공장 근로자 등의 확진 사례나 자가 격리 등이 잇따를 경우 생산 차질도 우려해야 한다. 각국의 입국제한 조치 등으로 필수 인력의 현지 출장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전기차 배터리 업계라고 사정은 나은 것은 아니다.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은 급증하는 배터리 수주 물량에 맞춰 미국과 유럽에 공장을 증설하는 상황이다. 코로나19 확산세가 계속되면 현지 및 출장 인력 운용은 물론 공장 가동과 자동차 판매 감소로 인한 생산 감소 등의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정유업계, 대외변수로 사면초가
정유산업은 아예 사면초가다. 산업 특성상 국제유가, 환율 등 대외변수에 따라 냉·온탕을 오가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근본적인 경쟁력 문제를 노출해 우려가 높다. 전문가들은 “정유산업이 ‘제2의 중공업’이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다. 최근 이 산업 종사자들은 지난해 영업이익이 30% 가까이 축소된 에쓰오일이 ‘희망퇴직을 검토한다’는 소식에 적잖이 놀랐다.
업계는 암울한 뉴스가 늘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강대국 간의 석유패권 전쟁으로 인한 ‘저유가’다. 지난 9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WTI(서부텍사스산원유)는 전 거래일보다 24.6% 급락, 31.13달러에 마감됐다. 1991년 이후 29년 만에 가장 큰 하락률이다. 미국과 사우디, 러시아의 석유패권 경쟁 격화하면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치킨게임’ 수준의 증산을 결정한 탓이다. 1949년 이후 70년간 원유수입국이던 미국은 기술혁신에 힘입은 셰일오일 개발 본격화로 2018년 세계 최대 산유국 지위에 올랐다.
저유가는 곧 국내 정유사들의 ‘재고평가손실’로 이어진다. 중동과 미국에서 원유를 수입, 정제해 석유제품을 판매하는 사업구조인 국내 정유사는 원유가 오는 동안 가격이 떨어지고 판매할 제품 가격까지 떨어지는 이중고를 겪는다. 배럴당 4달러는 돼야 손익분기점인 정제마진은 한때 9달러를 넘었지만, 올 1월 마이너스까지 기록했다.
◆항공·조선업계는 이미 고사 직전
항공·조선 등 물류업계는 더 나빠지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항공업계는 최근 대부분의 하늘길이 극도로 좁아진 상황에서 나온 펜데믹 선언으로 생존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은 80%가량의 노선이 운행 중단 또는 축소됐고, 저비용항공사(LCC)도 중국·일본 노선이 모두 끊기며 사실상 국내선만 가동하고 있다. 올해 6월까지 코로나19로 인한 국적 항공사의 매출 피해를 최소 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던 한국항공협회의 예상치가 수정될 가능성마저 거론된다.
글로벌 물동량이 크게 줄면서 조선업계도 한계에 부딪혔다. 영국 조선해양시황 분석기관 클락슨에 따르면, 지난달 세계 선박 발주량(30만CGT)은 전년(206CGT) 대비 85%나 급감했다. 국내 해운업계 5위인 흥아해운은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전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신청하기로 결정했다.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건설업계도 ‘휘청’
부동산 시장에서는 정부의 규제강화 조치가 맞물려 거래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지난달 서울의 아파트 거래량은 3235건으로, 1월(5806건)보다 44% 감소했는데 코로나19 확산세가 진정되지 않고 있는 만큼 당분간 거래량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3월 전국 주택사업경기실사지수(HBSI) 전망치는 51.0으로 전달보다 30.9포인트 폭락했다. 2018년 11월 이후 17개월 만의 최저치다.
해외건설 수주 실적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에서 한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국가가 늘면서 기존 사업은 물론, 신규 공사 수주에도 차질이 우려된다.
정부는 이날 건설사를 위한 유동성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건설공제조합과 전문건설공제조합은 16일부터 조합원의 출자금에 비례해 연 1.5% 내외 금리로 특별융자를 시행한다. 선급금 공동관리제를 6월 말까지 한시적으로 완화해 공제조합의 동의를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공사 선급금의 비율을 35%에서 17.5%로 축소할 방침이다.
박세준·조현일·이정우 기자 3j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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