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와 저는 같은 뿌리에서 돋아난 두 개의 가지와 같아요. 근거 모를 허무의식이 아버지를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삶으로 몰아갔듯, 저에게는 그렇게 지악스럽게 땅바닥을 기어가게끔 만들었어요. 아버지의 삶이 달랐다면 저는 지금과는 달리 세상을 보고 살아갈 수 있었겠지요. 아버지의 허황한 삶을 보아왔기에 저는 손가락에 거머쥔 것 하나라도 놓칠까 봐,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자린고비가 되어 추하게, 보잘것없이 작고 천하게……” (저 언덕에서)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마실이나 갔다 오게. 아이야 여자가 낳는 거지. 할머니가 손사래를 쳐서 내보냈다. 남자야 아이를 만드는 데나 소용 있는 거지 하는 뜻이었을 게다.”(옛우물)
오정희 소설 속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 미화되거나, 생계를 위해 딸을 착취한다. 가족을 방치한 채 허황한 이념만을 좇는 무력한 인물, 그러나 ‘아버지’란 이름의 ‘폭력적’ 권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딸은 아버지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제도권 안에서의 정돈된 삶에 강박적인 욕망을 갖는다. 작가에게 가장 또렷하게 존재하는 것은 여성이다. 누군가의 딸이며 어머니이자 아내이면서도 그에 앞서 무엇보다 자기 자신인 여성 인물들이다.
등단 53년째를 맞은 오정희 작가의 중·단편선이 새 옷을 입고 다시 선보였다. 중견 문학전문출판사인 문학과지성사가 기획하고 출간했다. 데뷔작 ‘완구점 여인’(1968) 등 초기 소설과, 시대적 어둠을 통해 현대 여성의 삶을 비추는 대표 작품인 전쟁 3부작 ‘유년의 뜰’(1980), ‘중국인 거리’(1979) ‘바람의 넋’(1982)을 포함해 모두 11편을 담았다.
한국 소설가의 대모로 불리는 오정희 작가에게 여성들이란 억압적 삶과 권태를 견딜 수 없어 충동적으로 집을 나가 떠돌아다니는 ‘은수’(바람의 넋), 통렬한 자기 인식 끝에 ‘아버지가 다르게 살았다면 나 역시 지금과는 달리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저항하며 살기를 선택한 ‘미옥’(저 언덕), 웃지도 않고 말도 않고 식탐만 많은 다른 애들하고는 좀 다른 관찰자 ‘노랑눈이’(유년의 뜰)로 묘사된다.

무능한 아버지와 가부장제에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나’(저녁의 게임)로서,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여성 인물들과 그들을 대하는 사회모순까지 오정희는 명료하게 비추어낸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딸들에게 “가끔은 절벽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리듯 두려움을 이기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단다. 그의 소설세계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 참혹함 속에서도 돋아난 절실한 용기를 발견한다. 견딜 수 없는 삶, 인간 존재의 허무를 일찍이 간파한 오정희는, 그간 촘촘히 쌓아올린 문장으로 내밀한 욕망의 얽히고설킴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한국전쟁 전후의 황폐한 풍경에서부터 오늘날 중산층의 허위까지 씨줄·날줄을 짜맞춘 듯한 글들은 읽는 맛을 더한다.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려내온 작가, 누구보다 단단하게 자기 예술을 밀고 나간 작가다.
중고교 교과서에서부터 친숙해진 오정희의 대표작이 다수 포함된 이번 컬렉션은 좀 더 엄격해진 전문가의 눈으로 세심하게 다듬어졌을 뿐만 아니라 각각 개성을 간직하면서도 서로 어울릴 수 있는 작품들이다.
책임 편집과 해제를 맡은 심진경 작가는 “모호한 수식어구와 정형화된 해석에 갇혀 오정희 소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서 “내면성의 탐구가 아니라는 작가 본인의 말처럼, 당시의 사회적 문제점을 되비추는 반사경으로서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고 풀이했다. 또한 오정희의 소설에 대해 심 작가는 ‘폭력적 권위와 위선으로 몰락조차 달콤한 실패담으로, 혹은 또 다른 성공담으로 윤색’해온 남성 중심의 낡은 서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사를 발명해 내려 한 결과물이라고 했다. 가부장제적 억압에서 비롯된 여성의 무력감 내지 좌절감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맥락을 되짚어가는 이야기도 된다.
오정희 작가는 2008년 현대불교문학상, 1996년 오영수문학상, 1982년 동인문학상, 197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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