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코털∼.”
회사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의 친근한 목소리가 들린다. 콧수염이라고 불러야 맞지만 자동반사로 내 고개가 ‘코털’을 부른 쪽으로 돌아간다. A선배다. 내 콧수염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인 A선배는 매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가운데 마지막 인사로 “얼른 깎아라”라고 말한다. 콧수염을 기른 지 벌써 반 년째. 회사를 들어갈 때마다 A선배의 농담 반, 진담 반 인사는 반복된다.
‘털보 국장’, ‘코털’, ‘미스터 포테이토(영화 토이스토리의 캐릭터)’, ‘할아버지 스머프’. 콧수염을 기른 뒤 얻게 된 별명들이다. 지난해 8월 열흘간 해외 출장을 다녀온 뒤 처음 수염을 본 지인들과 취재원들이 한목소리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헤어졌나”라고 물었지만 정말 이유가 없었다. 그저 면도기를 깜빡 두고 가는 바람에 수염을 깎지 못했던 것뿐이다.

어울린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콧수염을 기르는 이들이 적었던 탓이었을까? 깎으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소개팅을 주선하려고 하는데 상대가 콧수염에 부담을 느낀다”는 논리에는 일부 수긍할 뻔도 했다. 한 의원은 “콧수염 깎고 오면 답해 줄게”라며 취재와 콧수염을 두고 흥정하기도 했다.
콧수염을 기르기 전과 후의 나는 달라진 것이 없다. 일하는 직장, 만나는 취재원, 쓰는 기사 모두 변함없었다. 그저 남들이 잘 기르지 않는, 일부는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수염’을 기르는 기자라는 점이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그 다른 점이 나를 비난하는 이유가 될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심란하게 생겨서 털까지 붙여 다니네”, “너 지금 누구 취조하냐”, “안 어울리는 수염, 꼴값을 떨어요”.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열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기자간담회 때 조 전 장관을 향해 질문하는 내 모습을 본 일부 네티즌이 유튜브 영상에 단 댓글이다. 2000개가 넘는 댓글 중 추천 수가 높은 글들은 질문 내용에 대한 비판보다는 태도와 외모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다. “사모펀드 투자를 몰랐다”는 조 전 장관의 해명과 배치되는 공직자 재산신고 내용을 물어보는 질문과 그 답변의 모순에 대해서 지적한 댓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장 곤혹스러운 댓글은 일본인에 빗댄 댓글이었다. “수염도 일본 앞잡이처럼 길렀네”, “한국사람 맞나요. 왜놈처럼 생겼는데”. 과거 일제식민지 조선총독부 총독들과 관리들이 콧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콧수염=일본인’이란 잘못된 인식이 생긴 것 같다. 그러나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과 미국에서는 독일 빌헬름2세의 콧수염에서 유래가 된 ‘카이저수염’이 유행이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았던 단재 신채호, 몽양 여운형, 도산 안창호, 김좌진 장군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도 콧수염을 길렀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도 지난달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콧수염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총독들을 연상시킨다며 일부 한국인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싫어하는 대상의 ‘콧수염’이 ‘일본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오는 좋은 구실이 된 것이다. 어쨌든 그 모두가 편견의 산물이다.
“언제 깎을래?’라고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콧수염을 기른 나’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로 대접해 준다면 그때는 고려해 보겠다고.
이창훈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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