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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네상스·악플 범람… ‘양날의 검’ 표현의 자유 [이슈 속으로]

입력 : 2020-01-18 17:00:00 수정 : 2020-01-18 1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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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 살펴보니
‘가위질' 사라진 후 새 창작 시대 열어/ 1996년 헌재 ‘영화 사전심의 위헌' 결정/ 신세대 감독들 출현… 소재·형식 다양화/ 봉준호 칸 수상 등 한국영화 ‘퀀텀점프’/ 악성 댓글에… ‘연예인들 비극' 되풀이/ 의사 표현의 위축 이유 ‘e 실명제' 폐지/ 누리꾼들 모욕죄 적용… 벌금 등 그쳐/ “처벌 강화” vs “모욕죄 폐지” 의견 갈려

“봉준호 감독은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유남석 헌법재판소장이 지난 1일 발표한 올해 신년사의 한 구절이다.

유 헌재소장은 2019년 한 해 동안 한국이 이룬 여러 성취들 가운데 우리 경제가 3년 연속으로 무역 1조달러(약 1154조5000만원)를 달성한 점과 더불어 봉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점을 콕 찍어 언급했다. 봉 감독의 수상은 많은 한국인이 반긴 소식이었다. 연말에 여러 언론사가 선정한 2019년도의 ‘10대 뉴스’에 빠짐없이 포함됐다. 그렇더라도 법조계를 대표하는 헌재소장 신년사에 특정 영화감독 이름이 등장한 건 확실히 이례적이다.

유 헌재소장이 세계를 매혹시킨 한국 영화의 눈부신 활약상을 강조한 데에는 뭔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오늘날 한국 영화의 성장 배경에 다름 아닌 헌재의 일정한 역할이 있었음을 은연중에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헌재가 봉준호 감독 수상 크게 반긴 이유는

18일 영화계 등에 따르면 24년 전인 1996년 10월4일 헌재는 한국 문화사의 이정표로 평가되는 결정 하나를 내린다. 이른바 ‘영화 사전심의제’ 사건이다.

독자들 중엔 ‘가위질’이란 표현을 들어본 이가 있을 것이다. ‘검열관들이 상영 이전의 영화 필름을 돌려 보면서 문제가 될 만한 장면을 찾아 가위로 싹둑싹둑 자른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96년까지만 해도 공연윤리위원회라는 기관 관계자들이 영화의 일부 삭제나 수정 등을 제작자한테 지시하는 검열제도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 제도를 규정한 옛 영화법 조항들이 헌재 심판대 위에 올라 ‘위헌’ 판정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재판관 9명 전원일치 결정이었다. 2018년 김명수 대법원장 제청으로 헌재에 입성한 이석태 재판관이 당시 헌법소원 담당 변호사로서 위헌 결정을 이끌어냈다.

영화 사전심의에 대한 재판관들 태도는 단호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영화도 의사표현의 한 수단이므로 영화의 제작 및 상영은 다른 의사표현 수단과 마찬가지로 언론·출판·예술의 자유에 의한 보장을 받는다”며 “심의기관이 영화 상영에 앞서 그 내용을 심사하여 상영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헌법이 금지한 사전검열제도”라고 판시했다.

이 결정이 국내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영화계는 검열이란 오랜 족쇄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의 시대를 맞게 됐다. 앞으로는 정권의 이해관계나 관료의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 창작품인 영화가 가위질당하는 일이 사라지고 영화인들의 창작 의욕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당시 헌재 결정을 소개한 어느 일간지 기사의 일부다.

◆사전심의 위헌 결정에 활짝 열린 르네상스

헌재 결정 이후부터 2000년대 초까지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감독이 대거 등장했다. 그들은 이전의 국내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파격적인 스타일과 독특한 이야기로 무장한 영화를 폭발적으로 쏟아냈다. 지금도 영화인들 사이에서 그 시기는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린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미국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과 아카데미 영화상 6개 부문 후보작 선정 등 소식으로 계속 국민을 기쁘게 하는 봉준호 감독 역시 이 르네상스 시기에 데뷔했다. 봉 감독이 한국 영화 관객들한테 처음 이름과 얼굴을 알린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2000년도 작품이다.

영화 전문가들은 1996년 헌재의 영화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이 봉 감독 등 신세대 감독들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 토를 달지 않는다. 봉 감독의 칸영화제 제패 직후 최광희 영화평론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영화의 질적 도약은 헌재가 검열에 위헌 결정을 내린 1996년부터 본격화되었다”며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누리면서 소재의 영역도 넓어져 젊은 재능들이 충무로로 쏟아져 들어왔고, 봉 감독도 이때 유입됐다”고 말했다.

헌재소장 신년사 내용이 알려진 뒤 영화계와 법조계를 중심으로 “1996년 헌재가 주도한 사전심의제 폐지 후 20여년 만에 한국 영화계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의 쾌거를 이뤄낸 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헌재가 대폭 확대한 표현의 자유는 그야말로 한국 영화의 ‘퀀텀점프’를 가져왔다.

◆“악플도 표현의 자유”… 인터넷 실명제 폐지

그런데 세상 모든 일이 그런 것처럼 표현의 자유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한국 영화 발전의 뒤에 표현의 자유가 있듯 악성 댓글을 뜻하는 ‘악플’ 범람의 배후에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지난해 가수 겸 배우 설리(본명 최진리), 가수 겸 방송인 구하라 등 연예인들이 악플에 시달리다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형법상 모욕죄의 형량을 대폭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줄을 이었다. 검경 등 수사기관 실무상 악플을 단 행위는 거의 대부분 형법 제311조의 모욕죄를 적용, 처벌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당 조항은 ‘공연히 사람을 모욕한 자는 1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악플을 단 행위에 대한 법정 최고형이 고작 징역 1년이고 사안에 따라선 200만원 이하, 그러니까 고작 몇십만원을 벌금으로 내는 경미한 처벌로 끝날 수 있다는 얘기다.

왜 이런 걸까. 실은 악플을 발본색원할 장치로 2006년 ‘인터넷 실명제’가 도입됐었다. 누리꾼들이 익명성 뒤에 숨어 악플을 남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익명 말고 반드시 실명으로만 댓글을 달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2012년 8월23일 헌재에서 위헌 판정을 받고 폐지됐다.

당시 헌재는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핵심 근거로 들었다.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내린 결정 내용을 살펴보면 “본인 확인이라는 방법으로 게시판 이용자의 표현의 자유를 사전에 제한, 의사표현 자체를 위축시키고 그 결과 헌법으로 보호되는 표현까지도 억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자유로운 여론 형성을 방해한다”는 법리를 제시했다.

2005년 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를 주제로 열린 시민단체 기자회견 모습. 악플 근절을 위한 인터넷 실명제는 2006년 도입됐으나 6년 만인 2012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됐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악플 놓고 “처벌 강화” VS “모욕죄 없애야”

일단 헌재가 표현의 자유 보호를 명분 삼아 위헌 결정을 내린 이상 인터넷 실명제 재도입은 불가능한 형편이다. 형법상 모욕죄 강화가 악플 방지의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이유다.

지난해 말 자유한국당 김재원 의원 등은 모욕죄 처벌 수위를 대폭 올리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모욕죄의 처벌기준을 5년 이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대폭 상향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악플은 대부분 모욕죄로 처벌되는 경우가 많다”며 “고소·고발의 노력과 비용에 비해 처벌 수위가 낮아 범죄 예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모욕죄 강화에 반대하는 입장도 만만치 않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이 원내대표이던 지난해 6월 자신에 관한 언론 기사에 악플을 단 누리꾼 170여명을 모욕죄로 고소한 것이 계기가 됐다.

나 의원 측이 문제를 제기한 악플은 그를 대뜸 ‘친일파’로 규정하고 조롱하거나 욕설을 퍼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 의원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이름을 합친 ‘나베’란 표현이 대표적이다. 나 의원을 ‘발암물질’이라고 부른 악플도 있다.

악플을 단 누리꾼 대부분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검찰은 “피해자(나 의원)의 개인이 아닌 공인으로서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사유를 설명했다. 고소를 당한 누리꾼들한테 법률지원을 제공한 사단법인 오픈넷은 “일반 국민이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한 정치인을 정제되지 않은 다소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며 비난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죄 기소 및 형사처벌이 이뤄진다면 국민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크게 위축될 것”이라며 “국민의 표현의 자유 보호를 위해 모욕죄 폐지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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