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에 눈이 많이 와야 풍년이 든다는 옛말이 있다. 동장군 추위로 눈이 많이 오면 해충이 줄어서 그만큼 농작물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어서이다. 변온동물인 곤충에게 겨울은 먹을 것도 없고, 쉴 곳도 마땅치 않은 고난의 계절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겨울에도 멀쩡하게 잠자리가 살아 있다면 무엇일까. 묵은실잠자리가 그 주인공이다.
겨울을 넘겨 한 해를 묵는다는 의미로 붙은 이름이 묵은실잠자리이다. 흔히 ‘묵은지’잠자리라고 소개하면 잘 기억한다. 묵은실잠자리는 1877년 중앙아시아 투르키스탄에서 처음 신종으로 발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평양, 정방산 등 북한의 몇몇 지역에서 처음 보고되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물가 주변 풀밭이나 무덤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묵은실잠자리는 생김새도 수수해서 갈색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생겼다. 약한 모습과 달리 추위에 견디는 내성이 강해 영하의 겨울 날씨와 눈보라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대체로 무기력한 상태이지만 끈질기게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따뜻한 봄이 오면 활기를 되찾아 먹이활동과 번식활동을 시작한다. 암컷이 물풀에 산란하면 부화한 유충은 6~7월 약 2개월간 왕성하게 성장하는데, 성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유충시기는 짧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묵은실잠자리가 유럽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관심 대상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으로 아시아 지역에는 비교적 흔하지만, 서쪽인 유럽에는 매우 희소한 잠자리로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지중해 여러 국가에서 적색목록에 올려 관리하고 있다.
열감지카메라로 촬영한 결과, 겨울을 견디는 에너지는 몸통 중심인 가슴 근육에서 생성된다. 곤충은 흔히 변온동물이라 저온에 약할 것으로 추측하지만 묵은실잠자리는 적극적으로 발열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월동 생존율을 조사했을 때 이들의 개체 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도 결코 추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설치류 등 천적의 포식활동이나 가축, 사람에 의한 겨울서식처의 훼손이 근본 원인으로 고려된다고 한다.
김태우·국립생물자원관 동물자원과 환경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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