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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민의명저큐레이션] ‘미식’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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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18 23:21:39 수정 : 2019-11-18 23: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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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을 즐겁게 하는… 습관적인 기호” / 한국 음식은 ‘樂食’ 이라는 말 더 어울려

“미식은 미각을 즐겁게 하는 사물에 대한 정열적이고 사리에 맞는 습관적인 기호다.”(브리야 샤바랭의 ‘미식 예찬’ 196쪽)

입동(立冬)이 지나고 겨울비가 내리면서 이제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겨울비는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이럴 때는 따뜻한 것을 찾게 되는데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부침개를 부쳐 먹는 것도 비 내리는 오후와 딱 어울린다. 한국 사람은 부침개에 대해서라면 다들 일가견이 있다. 워낙 다양한 전을 즐기는 게 우리네 입맛이니 말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인생 부침개’도 몇 장면이 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시골 잔칫집에서 잘 달아오른 솥뚜껑에 돼지비계를 비벼 짜르르해진 위에 부쳐낸 부추전이다. 돼지비계로 부친 전은 식용유로 한 것보다 더 고소한 맛이 난다. 다른 하나는 한 노 교수의 사모님이 늙은 호박 속으로 만들어준 전이다. 밀가루를 거의 섞지 않은 그 달달하고 담백하고 촉촉한 식감을 잊을 수 없어 집에 돌아와 몇 번이나 흉내를 내어 해보았다. 또 하나는 한 초계탕 집에서 내놓은 메밀전이다. 식당 사장이 출입구에서 초벌구이한 것을 여러 장 쌓아두고 하나씩 재벌구이를 해서 모든 식탁에 한 장씩 올려주는데, 극단적으로 얇고 쪽파 한두 줄기가 붙어 있다. 입에 넣고 가만히 씹으면 메밀의 숨은 감칠맛을 끝까지 뽑아낸 맛이랄까. 사장 말씀이 메밀 반죽을 잘 발효시키는 데 비법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 가장 자주 해먹는 건 감자전이다. 밀가루를 섞지 않은 순도 100%의 감자전은 입안에 잠시 머물다 그냥 스르르 목구멍으로 밀려 넘어간다. 감자 전분을 잘 받쳐두었다가 감자에서 나온 물과 섞어서 따로 부치면 쫄깃쫄깃한 식감으로 마무리하기 좋다. 감자 두 알이면 폭신함 두 장과 쫄깃함 한 장으로 저녁을 대신할 수 있다.

이런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들다 보면 종종 미식의 세계를 맛보고 싶을 때가 있다. ‘미식 예찬’이라는 책은 18~19세기 유럽의 화려한 식탁 세계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의 법률가인 장 앙텔므 브리야 샤바랭은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나라가 조용해진 뒤 다시 돌아와 법률가의 삶을 이어갔다. 그는 특별한 정치적 야심 없이 친구들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걸 인생 최고의 즐거움으로 알았다. 그가 아흔이 넘어 낸 책이 바로 ‘미식 예찬’이다. 생화학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인간의 오감이 맛과 조응하는 원리를 해박하게 정리해나가면서 칠면조 사냥과 들판 요리, 숙녀들과의 식사 등 내밀한 미식 경험을 잔뜩 풀어놓는다. 참 정열적으로 먹고 예찬하다가 간 사람이다.

미식이란 무엇일까. 정열적인 욕망을 품되 그것을 조금만 취하는 것, 무엇보다 천천히 음미하는 것, 정확한 지식을 지니는 것, 강렬한 첫맛에 허겁지겁 몰두하는 게 아니라 단계별로 결을 즐기는 것. 하지만 샤바랭이 말했듯 그것은 ‘습관화’되어야 한다. 허겁지겁 흡입하기 바쁜 나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다. 비비고 섞고, 국물에 말고, 후루룩 하는 한국 음식은 서양식 디너와는 풍경 자체가 다른 것도 사실이다. 왠지 우리네에게는 미식(美食)보다는 낙식(樂食)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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