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발랄하고 직설적 화법 ‘파격’… 로맨틱 코미디 새 트렌드 이끌어 [한국영화 100년]

입력 : 2019-11-12 06:00:00 수정 : 2019-11-11 21:23:3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⑦ 김의석 감독 영화 ‘결혼이야기’ / 코미디 표방하지만 결혼 제도 조명 /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 화두 던져 / 최근 페미니즘 영화와 맥락 상통 / 영화 ‘결혼이야기’ 통해 PPL 시작 / 한국영화에 기업 자본 흘러들어와 / 신파 위주 멜로드라마 성향도 변화 / 서울 관객 52만6000명 흥행 대기록 / 대중성 강한 장르 영화 강세 이끌어 / 블록버스터·1000만 영화 교두보도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며 문득 생기는 질문. 영화를 산업으로 인식했던 첫 번째 인물은 누구일까? 아마도 신상옥(1926∼2006)일 것이다. 그는 제작부터 배급과 상영을 아우르는 ‘신필름’을 세웠던 앙시앙 레짐(구 체제) 시대 충무로의 거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제국은 1970년대에 붕괴했고, 이즈음부터 한국의 영화 산업은 장기 침체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인물은 누구일까? 여기서 ‘신철’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른바 ‘기획영화’를 통해 한국영화를 현대화했고, 1992년에 나온 김의석(62) 감독의 ‘결혼이야기’는 그 효시였다.

두 주연 배우의 뒷모습을 내세운 영화 ‘결혼이야기’(1992)의 포스터는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두 주인공은 각각 미국 배우 리처드 기어와 킴 베이싱어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기획영화’의 효시

‘결혼이야기’는 여러모로 새로운 영화였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한국영화엔 기업 자본이 흘러 들어왔고 간접광고(PPL)가 시작됐다. 물적 토대의 혁신적 변화는 당연히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착 자본으로 제작됐던 종래의 한국영화가 신파성을 기반으로 한 멜로드라마 중심이었다면, ‘결혼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라는 신문물을 도입했다. 이에 관객들은 갑자기 한국영화가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결혼이야기’는 젊은 관객을 타깃으로 한 트렌드 무비의 등장이었으며, 한국영화에 비로소 ‘마케팅’이란 개념이 본격적으로 결합하는 계기였다.

‘결혼이야기’는 제작 방식의 혁명이기도 했다. 1988년에 ‘신씨네’를 만든 신철(61)에게 맡겨진 첫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였다. 이 영화의 ‘기획’을 맡은 신철은 수백 명의 청소년을 만났고, 그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은 흔한 방식일지 몰라도 당시에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영화는 없었다. ‘결혼이야기’도 같은 방식이었다. 수많은 신혼부부들을 인터뷰했고, 그 결과물은 당대를 살고 있던 젊은 부부들에 대한 극도로 현실적인 묘사가 됐다.

산업적인 의미가 강조되긴 하지만, 이 영화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원동력은 바로 그 ‘현실성’에 있으며, 이 영화의 문제 제기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유효하다.

영화는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였던 문성근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누구나 살다 보면 결혼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삼키느냐 마느냐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부부인 태규(최민수)와 지혜(심혜진). 이후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특유의 유쾌한 톤으로 진행되는 듯하지만, 조금씩 심각해지며 갈등을 드러내고, 결국은 부부 관계에 대한 임상 보고서가 된다. ‘결혼이야기’는 장르 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결혼 제도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리얼리즘 영화인 셈이다.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부부의 이야기인 ‘결혼이야기’는 초반부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톤을 지니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결혼에 대한 진지한 질문

특히 이 영화의 ‘대사빨’은 한국영화에선 일찍이 접하기 힘들었던 발랄함 혹은 직설 화법이다. ‘결혼이야기’는 결혼에 대한 서릿발 같은 정의와 명언, 조언을 관객에게 던진다. 결혼이란 냄새나고 초라하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살 방법이며, 남자의 노랗게 된 팬티를 세탁기 안에 집어넣는 것이며, 생리대 한 봉지 속에 한 개가 아니라 무려 열 개의 생리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이며…. 하지만 유쾌하게 주고받던 구조는 섹스 문제에 직면하면서,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속성과 충돌하면서 균형을 잃는다. 그리고 냉소가 이어진다. 지혜의 선배에 의하면 결혼 생활은 속 빈 강정과도 같은 것이며, 전업주부는 가구와 같은 존재다. 그녀는 지혜에게 충고한다. “너도 빨래판 꼴 된다. 평생 대주기만 하는 빨래판.” 결국 지혜는 “당신과의 결혼 생활은 나에겐 악몽이었다”며 별거를 선언한다.

로맨틱 코미디를 내세우지만, ‘결혼이야기’는 ‘안개기둥’(1986·박철수 감독) 같은 영화에서 진지하게 제기됐던 “여성에게 결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영화의 전통 위에 있다. 이것은 여성 관객을 염두에 둔 기획일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언급해야 할 건 이 영화의 서늘하고 생생한 발언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혼이야기’는 극적 화해를 통해 다시 로맨틱 코미디의 자장 안으로 들어간다. 라디오 DJ가 된 지혜는 태규가 보낸 사연을 방송 중에 읽게 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남편의 엽서에 마음을 풀고 재회한다. 그리고 좋은 배우자는 없으며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내레이션을 통해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장르 영화로서 지닌 한계라면 한계다.

하지만 ‘결혼이야기’가 터놓은 물꼬는 이후 많은 영화로 퍼져 나갔다. 같은 해 겨울에 개봉된 ‘그대 안의 블루’(1992·이현승 감독)는 페미니즘 논쟁을 일으키며 여성의 일과 사랑에 대해 물었다. 이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오병철 감독)는 똑똑한 여자를 한국사회는 억압한다고, ‘처녀들의 저녁 식사’(1998·임상수 감독)는 간통죄가 있는 한국에서 프리 섹스는 불가능하다고, ‘정사’(1998·이재용 감독)는 결혼보다는 진정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유하 감독)는 결혼한 여자에게도 남몰래 만나는 남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아내가 결혼했다’(2008·정윤수 감독)는 필요에 따라선 남편이 둘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올해 우린 ‘82년생 김지영’(2019·김도영 감독)을 만나게 됐다. ‘결혼이야기’ 이후 한국영화는 여성과 결혼,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점진적으로 확장하며 강도를 높였고, 그 흐름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미약한 시작이었던 ‘결혼이야기’의 계보는 현재 한국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의 줄기를 이루게 된 셈이다.

‘결혼이야기’ 주연을 맡은 최민수(왼쪽)와 심혜진은 당대 가장 남성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를 지닌 배우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영화의 산업적 분기점

산업적 영향력도 못지않았다. 1992년 7월에 개봉된 ‘결혼이야기’는 서울 관객 52만6000명을 동원하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고, 신씨네가 제작한 ‘미스터 맘마’(1992·강우석 감독)는 22만7000명을 기록했으며, 김의석 감독은 다음 해 ‘그 여자 그 남자’(1993)로 22만8000명의 관객과 만나면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흐름을 이었다. 이 외에도 ‘가슴 달린 남자’(〃·신승수 감독), ‘101번째 프로포즈’(〃·오석근 감독) 등이 이어지며 이 장르의 붐을 이루었고, 당시 미국 할리우드 직배 영화의 공세 속에서 위기를 겪던 한국영화는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며, 기획영화가 충무로의 대안임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흐름을 이어받는 사람이 바로 강우석 감독이었다. 신철과 콜라보를 이루던 그는 ‘강우석 프로덕션’의 첫 작품인 ‘투캅스’(〃)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마누라 죽이기’(1994)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시네마서비스’를 통해 강한 대중성을 지닌 장르 영화를 만들고 직접 배급하며, ‘결혼이야기’에서 시작된 기획영화의 완성을 보여 줬다.

‘결혼이야기’는 첫 번째 ‘현대화된 한국영화’였고, 이 영화의 성공은 여러 기업들을 영화계로 끌어들였으며 이후 창투사(창업 투자 회사)와 외국계 자본이 들어오면서 한국영화의 자본 성격은 완전히 바뀌게 됐다. 물론 외환위기 시기에 시련을 겪긴 하지만, 2000년 이후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1000만 영화’가 등장한다. “왜 자본을 다른 곳에서 끌고 왔느냐고 묻는다면, 기존의 자본이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새로운 기획을 했느냐고 한다면, 기존의 것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제작자 신철의 말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 ‘결혼이야기’. 이후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체질을 바꿔 놓게 됐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