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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투병, 숨기면 ‘약점’이지만, 드러내면 ‘자격증’이죠”

입력 : 2019-11-03 10:30:00 수정 : 2019-11-03 11:4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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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서울 마포구 다리소극장에서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 공연이 끝난 뒤, 배우들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피디 제공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단지 난 암에 걸렸을 뿐인데.”

 

무대 위 배우의 나지막한 독백에 일부 관객은 슬쩍 눈가를 훔쳤다. 배우의 대사가 ‘암 경험자’들의 지난날을 떠올리게 한 거다. 지난 1일, 서울 마포구 다리소극장 무대에 오른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는 유방암 환자인 무대 연출가와 배우 이야기를 다뤘으며, 작품의 실제 기획자인 박피디(본명·나이 비공개)와 황배우(본명 황서윤·36)의 투병기이기도 하다. 이날 소극장에는 암 경험자와 가족 등 관객 180여명이 함께했다. 공연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2일, 소극장 근처 카페에서 만난 박피디와 황배우는 암 경험자로서의 지난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내 보였다.

 

◆같은 뮤지컬에서 연출자와 배우로…1년 간격으로 ‘유방암’ 선고

 

박피디와 황배우는 2008년 한 뮤지컬에서 조연출과 배우로 만났다. 작품 하나를 끝내면 배우와 스태프들은 저마다 길로 흩어졌고, 연락도 자주 하지 못했던 탓에 이때만 해도 두 사람은 먼 훗날 ‘암 경험자’로 같은 뮤지컬 무대를 기획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지난 10월, 유방암의 달을 맞아 한 화장품 회사가 주최한 ‘핑크리본 캠페인’에 참여한 황배우. 황배우 제공

 

박피디는 2015년 유방암 선고를 받았다. 연출자로서 일궈온 모든 것이 무너졌다. 믿기지 않아 병원 여기저기를 배회하던 그가 발길을 멈춘 순간, 눈앞에 ‘항암치료실’이 있었다. 박피디는 “영화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 주변의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며 “눈물 흘리면 내가 ‘암 환자’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 울지 않으려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고 그날을 떠올렸다.

 

황배우에게는 2016년 암 선고가 내려졌다. 선고일(10월27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그는 “그날을 전후로 인생이 바뀌었다”며 “너무 당황스러워서 ‘엉엉’ 울 수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주변에 통보한 황배우의 머릿속에는 ‘난 이제 어떻게 될까. 혹시 죽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암이 덜컥 자신을 덮친 순간, 피부로 와 닿은 공포에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박피디가 황배우의 암 투병 소식을 접한 건 그 무렵이다. 페이스북에 황배우가 “난 암환자다”라고 올린 글을 봤다. 황배우는 “암 선고 사실을 알릴 마음이 없었다”며 “주변에서 내가 암이라는 말로 가십거리 삼는 게 싫어 홧김에 공개했다”고 글 쓴 이유를 밝혔다.

 

◆‘암 경험’ 팟캐스트에 뿌리 둔 뮤지컬…‘암 극복 의지’의 산물

 

‘너도 암이고, 너도 암이가?’의 발음에서 유래한 뮤지컬 ‘아미고 아미가’는, 박피디와 황배우가 지난해 5월 시작한 팟캐스트에 뿌리를 둔다. 암 경험자 이야기를 인터넷 방송에서 내보내던 중, 주변에서 “투병에서 극복까지의 시간을 극으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다.

 

어려울 건 없었다. 한 사람은 원래 무대 연출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배우였으니 기획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왕 아픈 거 웃으며 암을 극복하자던 생각도 뮤지컬 기획에 탄력을 줬다. 다만, 공연하고 나니 아쉬운 점도 있단다. 보통 작품의 절반 수준인 50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 ‘빠르게 지나가듯’ 일부를 생략한 면이 있어서다. 박피디는 “(시간이 좀 더 길었다면) 주인공이 암을 극복하는 과정을 더 길게 담았을 것 같다”며 “암을 이겨내는 장면만 보더라도 관객(암 경험자)에게 (상처극복 면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2015년 유방암 선고를 받은 박피디의 항암수첩 일부 페이지. 항암치료에 따른 여러 증세를 기록했다. 박피디 제공

 

이번 뮤지컬은 두 사람 의지의 산물이다. 박피디는 항암치료 반작용으로 손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프고, 팔도 제대로 올라가지 않으며, 상체 숙이는 것도 버거운 현실에 산다. 가까스로 항암치료를 견뎠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해에는 자궁내막암 판정까지 받았다. 최근 2년간 매달 한 번씩 항암제 주사를 맞아온 황배우도 관절염, 소화불량 등과 싸운다. 이러한 고통에서도 두 사람은 긍정과 웃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다. 박피디의 항암수첩 표지에는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몸은 쓰면 쓸수록 강한 정신력이 나온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피하지 못한 사회의 편견…“힘들다고 숨으면 도리어 ‘약점’ 된다”

 

국립암센터에 따르면 2016년 기준 174만명 규모로 집계된 ‘암 생존자’들은 사회에서 ‘업무능력이 낮다’ 등 편견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피디와 황배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암이라는 말에 동료들이 밥을 같이 먹지 않고(박피디) △암 치료 중이라는 이유로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문전박대 당하는(황배우) 등의 어려움에 시달렸다. 황배우는 “(암 경험자는) 치료를 받을 뿐이지, 그 사람 존재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은 암 경험자들은 눈빛만으로도 힘들었던 지난날을 같이 위로할 수 있다며, 고된 시련을 이겨낸 ‘전우’와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은 “우리가 잘못해서 병에 걸린 게 아니다”라며 “힘들어서 숨기면 약점이지만, 드러내고 당당해지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자격증’이 된다”고 암 경험자들이 꿋꿋해지기를 바랐다. 특히 암 경험자의 가족도 시련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마련되기를 소망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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