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를 정복하는 자, 미래 자동차 시장을 지배하리라.”
최근 격변을 거듭하는 모빌리티 시장은 기존 자동차의 범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언뜻 보기에는 전기자동차의 비중이 커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도·센서기술과 ICT(정보통신기술), 배터리, 엔터테인먼트, 공유 플랫폼 등 여러 산업군을 진공청소기처럼 흡수함과 동시에 모든 기술 발전의 기폭제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기업순위(시가총액 기준)에서 상위에 포진한 기업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ICT 기업들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빌리티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한 이유다. 전통적인 내연기관 차량 제조사들은 전기차를 넘어 종합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을 지향하며 합종연횡도 불사하고 있다.
모빌리티와 관련한 부분에서 현재 가장 주목을 받는 분야는 단연 배터리다. 기존 내연기관차와 비교하면 엔진과 연료 역할을 대부분 대체할 뿐 아니라 친환경성 증대, 차량 무게 및 소음 감소 등 여러 혁신을 가능케 하는 열쇠이어서다. 주행거리 등 전기자동차 성능의 핵심을 좌우하는 것도 배터리다.
이 때문에 이 모든 변화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뜨겁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10위까지 독식한 한국과 중국, 일본의 경쟁은 특히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현재로선 한국도 선방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는 일본이나 물량 공세에서 기술 개발로 전환하는 중국의 공세를 계속 버텨낼 수 있을지에 대해선 장담하기 쉽지 않다.

◆배터리 시장도 ‘규모의 경제’
25일 에너지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으로 전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1위가 33.5%인 CATL(중국)이었고, 2위는 23.2%의 파나소닉(일본), 3위는 12.6%의 LG화학이었다. 삼성SDI는 4.4%로 6위, SK이노베이션은 1.8%로 9위에 각각 올랐다.
CATL의 점유율이 20.2%에서 33.5%로 대폭 올라가며 1위로 올라선 반면, 파나소닉은 테슬라 물량 축소의 여파로 27.0%에서 23.2%로 주춤하며 2위에 만족해야 했다. 지난해 13.0%로 3위였던 BYD(중국)는 5.6%로 대폭 줄어들며 LG화학에 밀려 4위로 내려앉았다.
국내 제조사의 경우 지난해와 비교하면 LG화학이 6.3%에서 두 배 가까이 뛰어올랐고,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 등 모두 시장점유율을 키우며 고무적인 분위기이다. 그러나 국내 3사의 점유율을 모두 더하더라도 2위 파나소닉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은 곱씹어볼 부분이다.

◆기술우위 주도권 지키는 일본
일본의 경우 최근 중국 기업이나 한국 기업의 공세에 다소 밀리는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시장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쥐고 있다. 그간 배터리 시장에서 나온 신기술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 그 증거다.
일본은 올해 24번째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아사히카세이의 명예연구원 요시노 아키라를 비롯해 리튬이온 베터리의 주요 핵심 소재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한국이 국산화를 목놓아 외치고 있지만, 일부 핵심소재 쪽은 기술격차가 20년 이상 벌어져 있다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현재 대세로 자리 잡은 리튬이온 배터리 이후 차세대 배터리로 자주 언급됐던 것은 전고체 배터리(전해질이 고체인 차세대 배터리)였다. 고체형이기 때문에 에너지 밀도가 높아지며 배터리의 성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현재 500㎞ 내외인 전기자동차의 주행거리를 1.5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왔다.
전고체 배터리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에서 연구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실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은 전 세계에서 도요타가 유일하다. 이미 전고체 배터리가 장착된 1인승 전기자동차를 테스트 운전했고, 2020년대 초반에 장착하겠다는 목표도 내걸었다. 2017년 도쿄 모터쇼에서 도요타 관계자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이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개발된 제품의 성능도 현재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매우 떨어지고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박철완 서정대 교수(자동차학)는 “여러 나라에서 전고체 배터리에 대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투자금을 끌어모으고 있지만 실제로는 1990년대 이후 별다른 진척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최근 전 세계적으로 업계가 경쟁적으로 리튬이온 배터리의 대량 설비투자에 나서는 상황을 보더라도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만큼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도 계속 주도적으로 나설 전망이다. 외신 등에 따르면 도요타는 전고체 배터리의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100억엔 규모의 국가 프로젝트를 주도함과 더불어 2030년까지 전고체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연구개발에 132억달러를 투입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적 성장 바탕으로 질적 성장하는 중국
중국 CATL의 성장 속도는 세계시장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CATL은 BYD처럼 세계적인 갑부로 꼽히는 워런 버핏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받은 것도 아니었지만 폴크스바겐과 BMW 등 주요 자동차 제조사와 납품 계약을 성사시키며 단숨에 1위로 떠올랐다.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중국의 배터리 수준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미미한 수준이었다. CATL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014년 2.1%로 10위권 밖이었고 원가경쟁력 등 여러 면에서 경쟁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시장 점유율은 어느덧 전 세계의 3분의 1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 정부 주도로 전기차 산업을 육성했고, 보조금 지원 등 자국 산업보호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는 이른바 ‘배터리 굴기’가 주효한 것이다.
내수를 바탕으로 생산라인을 급격히 늘리는 것도 놀랍지만, 최근에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글로벌 경쟁업체들의 숨통을 조이는 모습이다. 한국의 경우 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중국은 수익의 7∼8%가량을 연구개발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일본과의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국 정부 또한 양적 성장 위주의 정책에서 질적 성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국가보조금 지급의 기준을 강화하고 외국 업체의 접근성도 높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재 60여개에 이르는 중국 내 리튬이온 배터리 업체가 5년 뒤에는 3분의 1로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CATL은 더 이상 내수에 만족하지 않고 해외 진출에도 적극 뛰어들고 있다. 이미 독일과 일본, 미국 등에 자회사를 두고 있고, 2021년부터는 유럽에서도 배터리 공장을 일부 가동할 계획이다. 약 20억유로 이상을 투자해 독일에도 공장을 짓고 있다. 유럽 시장에 대한 장악력도 계속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일본 도요타와 파트너십을 맺고 신기술 개발 및 배터리 재활용 등에 대해 협력하기로 했다. 또 1회 충전으로 500㎞ 이상을 달리는 3세대 전기차의 핵심이 될 NCM811 배터리를 이미 전기차 제조사에 공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NCM811 배터리가 내년 중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 기준인 에너지 밀도 260Wh/㎏에 부합하는 제품임을 감안하면 자국 내 입지도 더욱 압도적으로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국내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ESS(에너지저장장치) 업계로도 사업 영역을 확대할 경우 국내 제조사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한국, “혁신과 쇄신 없이 10년 뒤 장담할 수 없어”
한국은 최근 LG화학 등이 생산 설비에 대한 투자를 적극 늘리며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이것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는 것이 사실이다. 양적 성장을 이뤘다고는 하지만 모두 합쳐도 여전히 중국과 일본 업체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기술적 우위 측면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세계시장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업계와 정부가 하나로 똘똘 뭉친 중국·일본과 달리 한국의 경우 정부가 별다른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내부 싸움도 점입가경인 상황이다. 최근 2년 넘게 이어지는 ESS 화재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정부와 업계, 학계 모두 역량이 미진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연이어 발생하는 ESS 화재뿐만 아니라 3년 전에 발생한 갤럭시 노트7의 배터리 폭발에 대해서도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밝혔다.
세계 배터리 업계는 최근 이어지는 설비투자 증설 등의 영향으로 2년 뒤쯤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정부든 학계든 인적 쇄신이나 기술적 혁신이 없다면 10년 뒤의 상황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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