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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 10월21~27일]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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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0-20 22:27:12 수정 : 2019-10-20 22:2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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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독일 민족은 통일을 이뤄 제국을 건설했으나 겉보기처럼 팔자가 늘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커지며 산업화가 진전되자 그에 비례해 골칫거리도 성장과 발전을 해서다.

1878년 10월21일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의회를 통과한 것도 독일제국의 그런 고민을 말해준다.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와 대결한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다.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보수적인 왕당파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1848년에 3월 혁명이 일어나 학생과 지식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자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라고 왕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왕이 혁명파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히자 그는 “이런 나약한 왕은 필요 없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퇴위하라”고 극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 혁명의 주역들은 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는 없었으나 바로 그해 칼 마르크스가 발표한 ‘공산당 선언’을 추종할 수 있는 세력이었으며 비스마르크는 그런 좌파들을 벌레처럼 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는 고작 프로이센이라는 소국 시절이었으나 대제국의 틀이 잡힌 이제 사회주의자를 탄압해야 한다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30년이 지나는 동안 독일의 산업도 발전했고, 노동자도 대폭 늘어났으며, 사회주의 이론은 세련돼 정치세력으로 크게 부각돼 있었다. 그래서 1500여명이 체포되고 수많은 사람이 국외로 피신했으며, 사회민주당과 각종 노동조합이 해체됐다.

그런 사태는 흔한 일이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가 나타나게 된 원인을 이해한 점에서 명재상 다웠다. 그는 노동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착안해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다. ‘의료보험법’(1883년) ‘산업재해 보험법’(1884년)에다 1889년의 ‘노령 및 폐질 보험법’이 그런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를 대하는 자세는 그의 외교를 보는 듯도 하다. 얼핏 전쟁광처럼 비친 이 ‘철혈(鐵血)재상’이 의외로 전쟁을 두려워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통일을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었으나 그 뒤에는 전쟁을 기피함은 물론 전쟁의 원인이 될 정책도 기피했던 것이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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