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저서 ‘반일종족주의’가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식민지 근대화론’이 재조명됐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위안부는 매춘”이라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들 모두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에 귀화한 일본계 정치학자 호사카 유지(63) 세종대 교수(교양학부)는 지난 1일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친일파를 만드는 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전략”이라며 “일본 측 논리를 그대로 TV 등 매체에서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보면 일본을 1년에 30번이나 오가며 일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극우재단 쪽에서 고액을 지원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 호사카 “일본 극우단체, 외국 학자들에게 고액 연구비 지원해 자기편으로..러일전쟁부터 시작한 친일전략”
호사카 교수는 이같은 친일사상 전파의 기원이 1904년 러일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당시 일본은 혁명세력(지배체제에 반감을 갖고 있는 세력)을 지원, 일본에 우호적인 정권이 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펼쳤다는 것.
그는 “대한제국에도 ‘일진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일본 극우파와 일본 정부가 함께 만든 한국 친일단체의 시작이었다”며 “일제강점기 때도 일본의 정책을 순조롭게 시행할 수 있도록 영향력이 있는, 엘리트들을 친일파로 만들었다”고 했다.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이광수와 3·1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최남선 등이 그런 대표적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호사카 교수는 한일수교 이후 이러한 움직임이 다시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즉 “일본의 자금을 동원해 일본 이해자를 만드는 가장 유명한 단체는 사사카와 재단, 지금의 일본재단”이라며 “미국, 중국에 이어 한국에서 로비를 가장 많이 하고 있다”고 전했다. 예를 들어 연구자가 연구할 때 한국에서 1억을 준다면 이런 단체들은 수십억의 연구비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영훈, 류석춘 교수가 그런 돈을 받았다는 것은 알 수 없으나 ‘반일종족주의’를 함께 쓴 이우연 낙성대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의 극우단체로부터 지원받아 유엔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 드러났고, 낙성대 경제연구소는 예전에 도요타 재단에서 연구비를 받은 사실도 있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극우단체로부터 고액을 받는 학자가 있다는 제보를 심심치 않게 받는다고 했다. 그는 “TV에서 일본 측 논리 그대로를 말하는 사람들을 알고 보면 일본을 1년에 30번이나 오가며 비밀회의를 갖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비밀회의기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고액의 돈을 (극우단체가)준다는 제보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물론 전체는 아니겠지만 이들이 일본 극우단체 편을 들게 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학자들 주장들이 왜곡된 정보라도 대중은 이를 사실인 것처럼 생각할 우려가 높다고 했다.
◆ “일본에 강제성 없었다?…식민지주의 불법성 부인하는 것”
이영훈 전 교수의 저서 ‘반일종족주의’ 내용과 류 교수의 ‘발전사회학’ 강의에서 한 발언들을 살펴보면 이들은 강제징용의 강제성을 일부 부정하고 있다. 일본 내 노동은 전시 상황에서의 ‘징용’에 불과했으며 이들에게 임금이 정상적으로 지불되었고 생활도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특히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이 일본기업에게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해야한다고 판결한 것에 대해 이들은 식민지배에 대한 피해 배상·보상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로 해결됐다고 봤다. 이것은 일본정부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서 제외하며 내세운 논리와 다르지 않다.
호사카 교수는 이에 대해 “이들의 주장은 일제강점기에 차별이 없었다는 것인데 1930년대 조선 철도공사 자료를 보면 같은 일을 하는데 일본인이 2엔 50전, 한국인이 2엔, 중국인이 1엔 50전을 받은 임금차별이 보여진다”며 “친일 학자들은 일본인의 액수가 많은 것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교통비 때문이라고 반박하지만 (한국인 보다)더 낮은 중국인에 대해선 답을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당시 신문에도 돈을 달라는 조선인을 칼로 위협했다는 등 일본 업주의 횡포기사가 많다”며 “1938년에 국가동원령이 시행됐고 1939년부터는 강제징용이 발령됐는데 (노동자들이)처음에는 자발적으로 갔다고 해도 강제징용령 이후에는 회사에서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즉 이런 문제는 일본 식민지 주의의 전반적인 불법성에 기인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호사카 교수는 “친일 학자들은 자발적으로 여성들이 위안부에 갔다고 주장하는데 밖으로 나갈 수 없게 감시하는 군대 위안소에 누가 가겠나”라며 “매춘을 예로 들어 물타기 하려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위안부 시작은 1932년 만주국(일본이 중국 둥베이 지방에 세운 국가)이 만들어졌을 때”라며 “만주국의 자료는 (일본이)다 태워버려서 남아있지 않지만 그때 이야기는 간부들의 증언으로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본군은 중국여성을 강간하고 성폭력을 휘둘러 성병에 많이 걸렸는데 이를 관리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침략이 본격화한 1937년 난징대학살부터 (일본군이)위안소를 엄청나게 많이 만들었다”고 1997년 일본 정부의 종군위안부관계자료 등에 나온 자료들을 꺼내 들었다. 당시 위안부 업주들은 직접 위안소까지 운영했는데 이들은 위안부를 위해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납치, 유괴했다는 것이다.

◆ 日극우단체 위협받는 호사카 교수…일본 향한 주장에 힘 실으려 일본이름 유지
호사카 교수는 일본 내에서도 친한(親韓)성향을 가진 학자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위안부 연구자도 많고 독도를 한국영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일부 극우세력에게 ‘미운털’이라고 했다. 극우단체 회원들이 수차례 항의전화를 해오고 만남을 요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사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일본인이 꽤 있었지만 만나지 않고 있다”며 “공개 강의는 경호원을 동원해서 하고 학교 사무실도 약속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고 했다. 혹시나 모를 테러 위협을 고려한 조치다.
최근 한 일본 매체가 그가 발간한 저서 ‘아베, 그는 왜 한국을 무너뜨리려 하는가’를 소개했는데 인터넷에서는 기사가 공유되며 악성 댓글이 꽤 달렸다고 했다. 반대로 한국에선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호사카 교수는 “어렸을 때부터 재일교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명성황후 사건을 책으로 알게 돼 많은 충격을 받았다”며 “거꾸로 일본 왕비를 외국 사람이 죽였다고 하면 일본인들이 그 짓을 한 외국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 생각을 하게 돼 한국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도쿄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호사카 교수는 1988년 한국에 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교수는 현재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이제 한국인이지만 일본을 향한 자신의 주장에 힘이 실리려면 일본식 이름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는 이유에서 ‘호사카 유지’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글·사진=안승진 기자·유승희 인턴기자 prod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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