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이 되면 미국인들은 2001년 ‘9·11 테러’로 숨진 희생자들을 기념한다. 특히 빌딩이 붕괴되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세계무역센터가 위치한 뉴욕시는 9/11 기념일 행사의 중심이다. 테러 공격의 중심이 된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 불리며 기념일 행사가 열리는 장소다.
테러가 일어난 후 몇 달에 걸친 희생자 발굴작업이 끝나고 빌딩의 잔해가 말끔히 치워진 후 뉴욕시와 시민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수천 명이 목숨을 잃은 이 장소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온 것이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에서 꺼낸 철재는 제철소로 옮겨 미해군의 최신 전함인 뉴욕함(USS New York)으로 환생해서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투입되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빌딩이 서있던 곳은 어떻게 바꿔야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그 자리에 다시 쌍둥이 빌딩을 복원해서 절대 굴하지 않는 미국의 정신을 보여주자는 의견도 있었고, 그 자리를 그대로 비워두어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상실한 뉴욕 사람들이 슬픔을 달랠 수 있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다원화된 미국 사회에서도 가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 생각이 충돌하는 뉴욕시인 만큼 논의 과정도 길고 복잡했지만, 결국 새로 짓는 무역센터는 그라운드 제로 옆에 세우기로 하고, 쌍둥이 빌딩이 있던 자리에는 기념관을 만들기로 했다.
기념관 설계는 유명한 건축가에게 맡기지 않고 공개 경쟁을 거쳐 선발하기로 했다. 자격조건도 없었고 누구나 응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건축가, 아티스트,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출했다. 기념관 건립위원회는 13명의 심사위원을 위촉해서 총 5201개의 기념관 설계안을 심사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최종 선정된 안은 런던에서 태어나고 뉴욕에 정착한 이스라엘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의 설계였다.

그런데 이 기념관의 디자인이 자못 충격적이다. 쌍둥이 빌딩이 서있던 두 개의 정사각형 부지를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지면 높이에서 연못으로 끊임없이 물이 떨어지게 했고, 연못 중앙에는 다시 정사각형의 큰 구멍이 있어서 연못의 물이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짙은 회색이나 검은색으로 되어 있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심연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게다가 그 정사각형 연못을 둘러싼 난간은 검은 돌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 마디로 무덤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인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우울하고 어두운 기념관 디자인이 선정된 것을 두고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에는 큰 문제 없이 지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 현대사에서 기념관과 기념비의 디자인을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앞서 말한 13명의 심사위원 중 한 명인 중국계 건축가 마야 린이다.
기념관에 대한 혁명적 전환이 일어난 것은 베트남전쟁의 종식을 알린 ‘사이공의 함락’ 이후 몇 년이 지난 1980년대 초였다. 베트남전은 미국인들이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전쟁이었다. 전 세계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했다가 참전으로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기지 못할 전쟁이니 중단하라는 여론이 일었고, 정부는 철수를 결정한다.
그렇게 전쟁에서 살아돌아온 참전용사들은 전쟁에 이긴 후 개선 퍼레이드를 했던 2차대전 참전용사와 달리 명분도 없는 전쟁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온 범죄자처럼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을 참아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베트남전을 그린 영화 <디어헌터>가 히트를 치면서 베트남전을 다시 생각하는 움직임이 일었고,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워싱턴 DC에 베트남전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건립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기부하고 잘 진행되던 사업에 문제가 생긴 것은 심사위원회가 선정한 기념관 디자인이 발표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기념관, 기념비라고 하면 하늘로 우뚝 솟은 흰색의 거대한 대리석 타워나 조각을 생각했는데, 선정된 디자인은 하늘로 솟기는커녕 땅을 파내고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고, 흰색이 아닌 짙은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설명이나 사실주의적인 묘사 없이 V자 형태로 된 벽에 베트남전에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도 아닌) 목숨을 잃은 날짜 순으로 가득 새겨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 디자인을 본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베트남전에서 죽은 군인들을 수치와 불명예를 연상시키는 검은색의 기념비로 만들어 지하로 숨겨버리려는 디자인이라고 했다. V자의 모양도 반전주의자들이 하던 평화의 손가락 사인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하필 당시는 미국 사회가 오랜 진보 정치를 끝내고 로널드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보수화하던 시기였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건 그 설계안을 만든 사람의 정체였다. 설계안 선정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설계자의 이름이나 소속 등의 정체를 완전히 숨긴 채 디자인만을 블라인드 심사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심사위원은 설계자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선정하고 확인해보니 예일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스물 한 살의 어린 중국계 학부생이었던 것이다. 당시 무명의 학생이었던 마야 린은 그렇게 전국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당시 많은 미국인들은 아시아인들은 다 같은 사람들처럼 생각했고, 베트남인과 중국인의 차이도 모르는 경우도 흔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수도에 세우는 베트남전의 기념비를 베트남 여자에게 맡기느냐”며 흥분했고, 기부금을 약속했던 부자들도 여론이 악화되면서 항의의 표시로 기부약속을 취소하는 일이 이어졌다.
문제가 커지면서 세금으로 건립을 지원하기로 했던 미국 의회까지 나서며 그런 모습의 기념관이 과연 적절하냐는 논의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건립위원회는 결국 마야 린의 디자인을 거의 수정 없이 그대로 통과시켰고, 참전용사들과 많은 미국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건립을 강행했다.
하지만 기념관의 개장과 함께 대반전이 일어났다. 워낙 전국적인 논란을 부른 기념관이라 엄청난 홍보가 되었고, 헌정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자 전국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렇게 기념관에 갔던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검은색 벽에 새겨진 남편과 아들, 아버지와 전우의 이름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동안 쉬쉬하며 숨기고 참던 슬픔이 놀랍도록 단조롭게 생긴 검은 벽 앞에서 터져나온 것이다.
방문객은 연일 줄을 이었고, 낮에는 물론 밤이나 새벽에도 혼자 찾아와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만지며 울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검은 거울 같은 표면 반대편에서 죽은 전우가 걸어나오는 걸 똑똑히 봤다는 이야기가 쏟아졌다. 또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기념비 앞에 간직했던 물건과 편지를 남기고 가는 바람에 관리사무소는 그것들을 모아서 보관하는 장소를 따로 만들어 운영해야 했다. 과거의 어떤 전쟁 기념관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1982년에 스물 한 살 대학생의 작품은 그렇게 기념관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바꿨다. 전쟁은 승리로 기념하는 것이 아니며, 슬픔을 숨기는 것은 비극을 기념하는 방법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뉴욕의 9/11 기념관은 베트남전 기념관이 바꾼 생각의 연장선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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