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단 위에 서 있는 두 관세음보살은 묵묵히 먼 태평양 바다를 응시했다. 적도의 태양이 관세음보살의 온화한 미소를 더욱 빛나게 했다. 왼쪽은 일본 호류지(法隆寺) 헌납보물의 금동불을 확대해서 만든 관세음보살, 오른쪽은 통일신라 시대의 불상을 본떠 만든 관세음보살이었다.
광복절을 하루 앞둔 지난 8월14일, 서울에서 6000여㎞ 떨어진 키리바시공화국의 타라와 환초에서 만난 두 불상은 지붕도 없이 공터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시멘트 바닥으로 포장된 공터에 놓인 두 불상은 이중으로 둘러싸인 철제 펜스로 보호받고 있었다.
어색했다. 영국과 미국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 개신교와 가톨릭을 믿는 키리바시공화국의 현지인들이 찾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굵은 쇠사슬로 문을 잠근 펜스는 현지인들로부터 두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듯했다.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이 왜 이역만리 적도까지 와야만 했을까.

궁금증은 불상 앞에서 풀렸다. 발아래 놓인 비문에서 불상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불상을 안내해준 베티오섬 가이드 몰리 브라운(65·여)씨는 호류지 금동불은 1982년 일본의 마셜제도 전투 희생자유가족회에서 만든 것이라고 소개했다. 불상 발아래 비석에는 ‘남영지비(南瀛之碑), 마셜제도 전투 희생자유가족회 우키타 노부이(浮田信家)’라고 새겨져 있었다.
통일신라 시대 불상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또 다른 관음보살은 한 손에 연꽃을 들고 있었다. 청동불상 앞 비석에는 “이 땅에 犧牲(희생)된 同胞(동포)께 哀悼(애도)의 뜻을 表(표)하며 冥福(명복)을 所願(소원)함니다. 靈魂(영혼)들이여 平安(평안)히 잠드시라. 合掌(합장). 1991년 11월 25일 建立者(건립자) 劉喜亘(류희긍) 協力(협력) 가와치 신포(かわち眞報)”라는 문구가 국한문혼용체로 적혀 있었다.
우키타씨와 류씨는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각각 1982년, 1991년 이곳까지 찾아와 제단을 쌓고 관음보살 불상을 만들어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을까.
서북쪽을 응시하는 관세음보살의 시선을 일직선으로 따라가면 한국을 맞닥뜨리게 된다. 고향에 가지 못하고 타라와 환초의 베티오(Betio)섬에 잠든 영령에게 관세음보살이 6000여㎞의 여정을 안내해주는 것만 같았다.

◆76년 전 76시간의 전투 흔적 고스란히 간직한 베티오섬
타라와 환초는 15개의 산호섬이 거대한 부채꼴을 이루고 있다. 11만여명의 키리바시공화국 인구 중 절반 이상이 타라와에 거주하며 대부분이 수산업에 종사한다. 한국에는 원양어선들이 기항하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타라와는 약 500㎢에 달하는 환초 내 얕은 바다와 깊은 바다 사이를 오가는 물고기들을 잡기 안성맞춤인 곳으로 수십척의 배들이 먼바다에서 고기잡이에 한창이었다.
오늘날의 평화로운 모습과 달리, 76년 전 타라와는 태평양전쟁의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시작된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전쟁의 전세는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미국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미국은 일본 본토로 이어갈 거점 공략을 위해 일본군이 점령한 태평양의 섬을 탈환하는 상륙전을 개시했다. 1943년 11월 20일 벌어진 타라와 전투는 미군이 태평양전쟁 중 벌인 최초의 대규모 상륙전으로 미군 3만5000여명과 일본군 4800여명이 맞붙었다.


76시간의 전투는 끔찍했다. 미 해군과 해병대 1021명이 숨졌다. 일본군은 17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망했다. 이곳에 노무자와 군속 등으로 끌려간 조선인 1200여명 중 100여명을 제외한 나머지도 모두 전쟁으로 숨졌다. 타라와는 강력한 함포와 전폭기의 지원을 받은 미군이 섬을 요새화한 일본군의 ‘옥쇄(玉碎)작전’에 부딪혀 큰 희생자를 냈던 첫 전투였다. 영문도 모른 채 고향에서 수천㎞ 떨어진 적도 부근 섬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전투 전에는 강제 노역으로, 전투 중에는 총알받이로 사지(死地)에 내몰렸다.
전쟁의 상흔은 76년이 지나서도 베티오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시바자키 게이지(柴崎惠次) 해군소장은 베티오섬을 철저하게 요새화했다. 벙커 중 일부는 당시 쏟아지던 미 해군의 함포와 전폭기의 폭격에도 무너지지 않고 지금도 건재하다. 구멍 난 스펀지처럼 외벽에 함포 사격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두께 1m가 넘는 콘크리트 벽을 3중으로 쌓아 올린 벙커의 내부는 지금도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부 현지인들은 지하를 파고 만든 벙커 위에 지붕을 만들어 집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해안가를 따라가며 마주한 해안포와 상륙을 막기 위한 콘크리트 방해물, 포대, 미군 상륙함의 잔해는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미 해군 함정을 격추하기 위해 지상에 설치한 함포와 일본군 89식 5인치 해안포는 녹슬었어도 포대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포대는 아이들의 술래잡기 놀이터로, 반쯤 바닷물에 잠긴 미군 상륙함은 아이들의 다이빙 포인트로 바뀌었다. 상륙한 미군을 겨냥하던 타원형 지붕의 기관총 진지는 아이들의 미끄럼틀이 됐다.

◆실종자 유해 찾는 미·일본군 유적 보존하는 일… 한국은 없었다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미군은 전진했다. 미군은 전몰 장병들의 유해 일부를 하와이로 가져왔지만 섬 복구와 다음 작전을 위해 다수의 유해는 현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미 정부와 미군 실종자 유해를 찾는 비영리단체 ‘히스토리 플라이트(History Flight)’가 간헐적으로 유해를 수거했지만 본격적인 유해 발굴·봉환 작업은 2016년 시작됐다. 미국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은 2016년 ‘타라와 유해 프로젝트’를 발족해 현재까지 베티오섬에서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
베티오섬을 방문했을 땐 2곳에서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약 1m 깊이까지 땅을 판 뒤 흙을 퍼내 뼛조각과 유품 등을 찾고 있었다. 뼛조각과 유품은 베티오섬 인근 항구의 연구실로 옮긴 뒤 사람 뼈 유무를 확인해 하와이의 DPAA 본부로 옮겨진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미국 측 관계자는 “미군이 남긴 기록이나 현지인의 증언을 토대로 발굴 현장을 찾는다”며 “장소에 따라서 불과 20∼30㎝ 아래에서 유해가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DPAA에 따르면 현재까지 114명의 미군 장병의 유해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일본 또한 타라와 전투를 잊지 않고 있었다. 일본은 1980년대 베티오섬과 바로 옆 바이리키(Bairiki)섬을 잇는 방죽길을 건설했다. 만조 때마다 섬이 되던 베티오섬은 일본의 도움 덕분에 차로도 닿을 수 있는 섬이 됐다. 시바자키 소장이 본부로 사용했던 벙커는 일본 기업의 지원을 받은 교회가 따로 관리하고 있었다. 타라와 전투에서 숨진 일본 장병의 유가족들이 1년에 2∼3차례 단체로 베티오섬을 찾아 추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타라와 전투에서 조선인이 끌려와 숨진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베티오섬의 유일한 관광 가이드인 브라운씨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20여년 전 새겨진 ‘반성과 회한의 마음’… 그리고 잊힌 타라와 전투
류씨가 회장을 맡은 ‘타라와·메이킨 섬 우리 동포 희생자 유족회’ 회원들이 일본인 가와치씨의 도움을 받아 1991년 세운 관세음보살 불상 발아래에는 대리석에 조각된 또 하나의 비문이 있었다. 누가 세웠다는 이름도 없었다. 비석을 세운 시점과 글귀만이 일본어로 새겨 있었다.
“인류는 평등하며 차별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무명을 끊고서 넓은 지혜를 받들어, 다시금 이러한 슬픈 시대가 오지 않도록 깊은 반성과 회한의 마음을 바치며, 엎드려 이 땅에서 저물어간 여러 영혼의 명복을 빈다. 1992년 3월.”
베티오섬을 찾은 일본군 전사자 유가족 중 누군가가 세운 것이었을까. 이역만리에 끌려와 숨진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유일한 일본어 비문이었다.
타라와=글·사진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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