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헌법은 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한다.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에는 ‘국민이 주인인 공화국(republic)’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대한민국의 영어 표기는 ‘Republic of Korea’다. 그렇다면 공화국이란 무엇인가.
이탈리아 정치학자 모리치오 비롤리는 저서 ‘공화주의’에서 “공화국이란 법과 공공선에 기반을 두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만들어낸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한다. 공화주의는 “공화국의 이상에 영감을 준 정치사상의 길고도 다양한 전통”이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공화주의는 공화국과 자유의 이념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양자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시민윤리(또는 시민적 덕성·virtu civile)가 필요하다는 이념의 주장에 의해 다른 정치사상의 전통들과 구분된다.”

공화주의 사상가들이 추구하는 근본적인 가치는 정치적 자유다.
“진정한 정치적 자유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인들이 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행동에 있어서) 다른 개인들이나 기관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형태의 주종적 지배(dominazione, 또는 예속·dipendenza)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비롤리는 오늘날 공화주의의 근원을 중세 말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찾는다. 그는 “몇몇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성벽 안에는 군주도 왕도 없이 시민들이 하나의 법제도 아래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다”며 여기서 근대적인 공화주의 사상이 태어났다고 했다. “이 공화주의 사상은 자유 원리를 숭상하면서 이 자유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정치적·법적 수단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이론 체계였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여러 공화국들을 일관하는 원칙적 요소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시민들로 구성된 ‘나라(la citta)’, 즉 시민공동체 개념”이라고 했다.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나라 전체와 관련된 공적 논의 및 결정이 시민단 전체를 대표하는 공회에 맡겨지게 되는 경우, 이러한 주권적 결정은 통치자들이나 특정 정파, 특정 사회집단의 사적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따라서 시민들을 예속으로부터 보호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을 붙인다.”
비롤리는 근대 초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키아벨리는 저서 ‘로마사 논고’에서 사적인 이해관계가 나라를 지배하면서 일부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으려 할 때 이를 저지할 수 있는 힘을 공화정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공화정이 자유 수호에 가장 적합한 통치방식임을 명쾌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마키아벨리는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공공선은 공화국이 아니고서는 지켜질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공화국에서는 공공선에 합당한 것들이 모두 실행될 수 있고 공공선의 실행에 의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많아 이들이 그것에 의해 손해를 보는 특정 개인들의 반대를 누르고서라도 공공선을 실현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롤리는 공화주의의 이상은 “어느 누구도 굴종하지 않도록 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주종적 지배를 허락하지 않는 공동체”라고 한다. 그는 “민주적인 사회는 고귀한 시민적 삶의 중요성과 가치를 설득할 수 있는 정치언어, 도덕언어가 필요하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공화주의의 정치언어는 철학적 언어라기보다는 수사적(修辭的) 언어였으며, 진리를 모색하기보다는 공공선, 즉 공동의 이익을 모색했다. 그것은 지혜 외에 어떤 추상적 이론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공화주의에서는 정치 공동체의 시민이 되는 것을 중시한다.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시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자치적인 종족-문화 공동체에 소속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또는 ‘키비타스(civitas)’ (즉 개인들이 법의 지배 아래에서 정의와 자유를 만끽하면서 더불어 살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정치적 공동체)의 멤버십에 따르는 여러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행사한다는 데에 있다고 믿었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공공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정의인데, 왜냐하면 오직 정의로운 공화국 안에서만 개인들이 타인의 의지에 굴종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롤리는 오늘날 민주적인 제도들은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열정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주의는 민주주의적이며 다문화적인 나라들 속에서 ‘자유’와 ‘책임’이라는 두 단어를 다시 연결하는 시민적 습속, 시민적 문화를 자신의 새로운 정치적 비전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지금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국가적 현안이 제기될 때마다 편가르기에 따른 거칠고 비생산적인 논란이 불거지곤 하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공화주의가 강조하는 ‘공동체에 대한 성찰’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롤리는 정치사상이 “‘사이언스(학문·science)’에 속하는 분과가 아니라 ‘레토릭(말하는 기술 또는 수사학·rhetoric)’에 속하는 분과”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성의 동의를 얻고 열정을 움직이기 위해 고안된 과거의 ‘말하는 기술’을 복원하여 배우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성공적으로 우리의 독자들과 시민동료들을 설득하여 이들이 민주공화국에 친화적인 여러 정치원리들을 받아들이고 몸소 실천하도록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정치사상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아닐까?”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고도 우리 정치가 여전히 실망스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정치사상의 빈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제쳐 두고 사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박완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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